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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젤리
0.
그 날,
그러니까 유진이 강해져서 돌아오기로 한 그 날 이후로 정확히 '2년 7개월' 만에 유진이 돌아왔다. 이렇게 정확한 개월 수까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혜준이 그를 손꼽아 기다린 탓이었다.
"2년 7개월 만이네요, 한유진씨."
유진은 이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간간히 중얼거리곤 했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혜준의 성대모사를 하며 대사를 읊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혜준은 웃었다. 물론 유진도.
2년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기다려온 그들이 손을 맞대고 입을 맞대고 이어 몸까지 맞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
돌아온 유진은 서울 모 회사의 투자 고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혜준은 여전히 세종에 위치한 기재부에서 일을 했으니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보냈다. 혜준은 기재부의 그 누구에게도 유진과의 연애를 알리지 않았으나 이 소식이 기재부에 쫙 퍼지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해외로 간 이헌에게 까지도 소식이 닿았으니 분명히 박수종 짓이리라. 혜준은 생각했다.
채이헌한테 연락이 왔다고요? 오전 10시 34분 1
잘됐네요. 이제 누구 여자인지 확실히 알겠네. 오전 10시 34분 1
뭔 소리야…
미리 보기로 유진의 카톡을 확인한 혜준은 중얼거렸다. 핸드폰을 뒤집은 혜준은 야구공을 만지작거리며 일을 하는 수종의 뒷모습을 째려봤다. 혜준은 야구공으로 박수종을 맞추고 싶다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 이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
유진은 혜준과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매일같이 연락을 했다. 서울에서 세종까지 내려와 혜준을 귀찮게 만드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둘의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다던 그 답게 다양한 뮤지컬을 봤다. 물론 그의 생생한 후기를 듣는 것은 모두 혜준의 몫이었다.
2022년 xx월 xx일
(사진)
오늘은 뮤지컬 보고 왔어요. 오후 9시 2분
오후 9시 2분 또 후기 적고있죠?
넘버들이 하나같이 다 너무 좋았어요. 혜준도 좋아할 거예요.
특히 남자주인공
메인 넘버가 어려워 보이던데 되게 잘
이제 듣는 거 지겨워요? ㅠ 오후 9시 2분
ㅋㅋㅋㅋ 유진씨 얘기 듣는 거 재밌어요~
오후 9시 3분 오늘은 웬일로 사진이 한장이네요?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오후 9시 3분
오후 9시 3분 그만
(사진)
(사진)
나 보고 싶었어요? 오후 9시 3분
유진은 뮤지컬은 물론이고 다양한 전시 또한 즐겼다. 역시 그 후기를 듣는 것은 모두 혜준이었으나 혜준은 유진의 자세한 후기를 반겼다. 유진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잘 표현할 줄 알았다. 유진은 좋은 이야기꾼이었고 혜준은 훌륭한 관람객이었으니 둘의 대화는 항상 길게 이어질 수 있었다. 혜준과 유진이 함께 전시를 보고 혜준도 이야기꾼이 되어도 대화는 이어졌다. 둘의 시각과 관심사는 같은 듯 달랐다. 혜준은 항상 유진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냈고 유진 또한 혜준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았다. 유진은 그럴 때마다 반짝이는 혜준의 눈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을 좋아했다. 유진이 항상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는 부분이었다. 물론 자신을 째릿- 째려보는 혜준의 눈빛까지도 포함이었다.
3.
이 날은 혜준이 연차를 내고 유진의 집에 갔던 날이었다. 유진에게 요리를 해주기 위해 장을 봐온 혜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우편물을 챙겼다. 공과금 우편 사이 미국의 회사에서 온 우편들이 섞여 있었으나 혜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혜준은 유진에 집에 꽤 자주 들리곤 했다. 서울에 오면 대부분 유진과 지냈으니. 유진의 집에는 어느새 하나 둘 혜준의 물건이 늘어갔다. 혜준의 집에도 마찬가지였다. 혜준은 자신의 집이 혼자 살기엔 넉넉한 공간이라 생각했지만 유진이가 자신의 공간에 있을 때마다 꽉 차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유진은 항상 침대가 작다며 불평하다가도 잘 때가 되면 침대가 작다는 핑계로 혜준에게 들러붙었다. 혜준은 어느 날 자신의 집에 킹사이즈 침대가 들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해했지만 -물론 그랬다간 혜준은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들어갈 공간이나 있으려나?
혜준은 혼잣말이나 하며 웃음 지었다. 오늘의 요리는 갈치 조림이었다. 혜준은 갈치조림 얘기를 하던 유진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 웃었다. 혜준에게 유진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유진의 몸 자체가 따뜻하기도 했고… 뭐… 그런 쪽으로도.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웃는 게 귀엽긴 한데."
유진은 팔로 혜준의 허리를 감싸며 볼에 입을 맞췄다. 유진의 온기가 느껴졌다. 유진은 자신의 팔에 혜준의 품이 딱 맞게 들어오는 것이 좋다며 혜준이 뒷모습을 보일 때면 자주 껴안곤 했다. 그렇다고 앞모습일 때 안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유진씨가 나한테 갈치조림 먹자고 하던 날 생각이요? 그땐 뭐든 별로였겠지만 갈치조림은 더 아니었던 것 같아."
유진은 그 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머리 스타일과 옷에 신경 쓰는 유진은 오늘도 머리를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기고 쓰리 피스 수트 차림인 채였다. 유진 외에 쓰리 피스 수트를 입은 남자를 본 적이 있는지 혜준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유진은 항상 혜준이 선물한 반지를 꼈고 향수까지 그날의 스타일링에 맞게 뿌렸다. 참고로 말하자면 요즘 유진의 최애 반지와 향수는 모두 혜준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으음… 반박을 못하겠네. 이 사무관이랑 밥 먹고 싶어서 미쳤었나 봐. 그 때 나한테 미친새끼라고 그랬던거 기억하죠."
혜준과 유진은 식사를 하며 그 때의 기억을 곱씹었다. 유진을 만나러 간다 하자 가스총을 챙겨준 마리에 대한 이야기, 비행기에서 혜준의 사진을 보던 유진의 이야기. 해가 저물어갈 때쯤 시작했던 그들의 식사가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같은 날, 유진은 혜준에게 출장 소식을 전해왔다. 유진의 출장은 꽤 잦은 편이었기에 혜준은 여느 때와 같이 담담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요?"
"미국이요. 캘리포니아. 이번엔 좀 오래 있을 것 같아요."
"으응… 잘 다녀와요. 어머니도 뵙고 와요?"
따뜻한 침대에서 노곤해진 혜준이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유진은 반쯤 눈이 감긴 혜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 그래야죠. 앞으론...
말을 흐린 유진이 혜준을 껴안으며 누웠다. 혜준은 침대의 온기가 유진 때문인지 생각하며 유진을 마주 안았다.
"가기 싫다. 그냥 이혜준이랑 있을까?"
"어머니 안 볼 거예요? 못 뵌 지 꽤 됐잖아요."
"그래도… 이 사무관이랑 있는 게 더 재밌는데."
"애예요? 내 핑계 대게. 잘 준비해서 다녀와요. 갔다 오고서 나랑 더 놀면 되잖아요, 알겠죠?"
"지금도 놀아 주는건요?"
유진이 혜준에게 입을 맞췄다. 혜준의 입 안으로 유진의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혜준과 숨을 나누던 유진은 이내 혜준의 위로 올라오며 허리를 쓰다듬었다. 유진의 입이 혜준의 목으로 내려왔다. 혜준은 소리를 참으며 숨을 내쉬었다. 유진이 손을 뻗어 리모컨으로 방의 불을 껐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오렌지 색 빛들이 겹쳐진 두 사람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오렌지 색 빛은 오래도록 그들을 비췄다.
4.
"이 사무관, 어제 제대로 못잤어?"
"아 예… 집에서 자료 좀 보느라고."
거짓말이었다. 유진은 3주 간의 출장을 떠났고 출장 가기 전날 밤, 유진이 계속 혜준을 놔주지 않는 바람에 혜준은 점심시간까지도 피곤함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혜준은 당장에라도 유진에게 연락해 화를 내고 싶었으나 비행기를 타고 있을 유진에겐 닿지 않을 테니 혜준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거 들었어? 국고국의 최 주무관도 가정용 휴머노이드 구입했대. 나 아는 형님도 그거 쓰는데 되게 좋다고 나한테 엄청 추천을 하더라니까."
"오 진짜요? 하긴 요즘 진짜 많이 쓰긴 하더라고요. 저도 하나 사볼까 해서 좀 알아보는 중인데 주무관님 어디 꺼 사셨 대요?"
"뭐라더라 그 뭐... H로 시작하는 어쩌고였는데..."
"아 거기요? 거기 제품이 제일 유명해요. 그 회사가 이제 맨 처음..."
"저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천천히 식사하세요."
"어어, 이 사무관 먼저 들어가. 가서 눈 좀 붙여!"
"네 사무관님 들어 가세요~ 그러니까 걔네가 제일 먼저..."
수종과 신입 사무관은 죽이 잘 맞았다. 점심시간 때마다 여러 주제로 이러쿵 저러쿵 잘 떠들어대곤 했는데 오늘은 주제가 가정용 휴머노이드인 것이었다.
뭐 요즘은 많이들 쓰니까.
혜준은 피곤함에 수종과 신입 사무관의 대화를 귀담아듣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혜준은 사무실로 올라가며 유진에게 짧은 메세지를 남겼다. 유진에게 답장이 온 것은 혜준이 잠자리에 들 때쯤이었다.
5.
2022년 xx월 xx일
혜준 자요?
캘리포니아에도 갤러리가 많더라구요.
여기는 사진 촬영이 금지라 혜준한테 보여주지못하는게 아쉽네요. 오전 3시 42분 1
2022년 xx월 xx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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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 밥은 먹고 일해요?
또 나없다고 저녁 대충 먹고 그러면 안돼요.
나도 이제 밥 걱정하는 거 보니까 한국 사람 다 됐나봐. 오후 3시 39분
오늘은 뮤지컬?
걱정마세요 한유진씨.
안그래도 오늘 회식이래요.
오후 3시 39분 가기 싫어ㅠㅠ
…
2022년 xx월 xx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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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프로젝트인지 길가에 피아노가 있네요.
혜준이 피아노 치는 모습 또 보고 싶어요.
전에 쳐준 곡 정말 좋았는데. 오후 12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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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이 이 작가 그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후 2시 19분
David Browy 작가 우리 저번에 갔던 전시회에
몇 점 있었잖아요.
여기 있는 그림이 훨씬 느낌이 강렬하고 좋아요.
크기가 커서 그런지 확실히 작품이 주는 압도감도 크고.
커서 한국에 못 가져갔나? 오후 2시 20분
보고싶어요. 이혜준. 오후 2시 24분
회의하느라 지금 봤어요.
나도 보고싶어요.
근데 나 보고 싶다는 사람치곤 되게 잘 있는 거 같은데요?
일하러 간 거 맞아요?
오후 3시 22분 일 좀 해요.
2022년 xx월 xx일
오늘 어머니 뵈러 간다고 했죠?
오후 11시 51분 잘 뵙고 와요.
어머니 만났어요.
나 보자 마자 혜준씨 잘지내냐부터 물어보시네요. ㅋㅋㅋㅋ
이젠 나보다 혜준씨를 더 예뻐해. 오전 9시 03분
주말 동안 여기 있다가 다시 캘리포니아로 가서
일 마무리 할거예요.
이혜준 보고싶어서 안되겠어. 빨리 하고 가야지. 오전 9시 04분
나도 보고싶으니까 빨리 하고 와요.
어머니랑 잘 놀고요.
오전 9시 04분 사랑해요.
나 보고싶어도 일 열심히 해요. 사무과ㄴ
WOW.
나 지금 캡ㅂ쳐햇서요배경화면 해둘래 오전 9시 04분
유진의 오타 섞인 답변에 혜준은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 놨다. 출근하기 전 들른 편의점에서 혜준은 괜히 유진 생각에 오렌지 주스를 샀다. 혜준은 그 주스를 마시며 오전 회의를 준비했다.
6.
오늘은 뭔가 재수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애초에 월요일인 것부터 싫었지만 혜준은 집에서 나오자 마자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봐야 했고 1층에서 내리고 나서야 차 키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신호등이란 신호등은 모조리 걸리기 일쑤였고 덕분에 혜준은 지각을 겨우 면했다. 프린트를 하려고 하자 잉크가 딱 떨어졌고 신입 사무관이 엎지른 커피에 혜준은 양말이 젖었다. 재수 없는 일이 계속 벌어지자 수종은 혜준에게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건넸다. 커피를 수습하자 이번엔 일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혜준은 핸드폰을 확인할 틈새도 없이 정신없이 일을 하고 회의에 들어 갔다. 지친 눈을 한 수종이 자신도 설렁탕을 먹어야겠다며 중얼거렸다. 몰아치는 일에 진짜 문제와 마주한 건 혜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미리 전기장판을 켜 둬 따끈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한 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콤한 노란색 앱의 빨간 원 속 숫자는 겨우 5개 남짓, 유진이 하루 종일 연락을 남겨두지 않았기에 가능한 숫자였다. 100개쯤의 알람을 각오했던 혜준은 맥 빠진 손가락으로 5개 알림의 주인공인 마리에게 답장을 했다. 왜인지 서운한 감정에 혜준은 손 끝이 찡했다.
아직 미국은 주말이니까 어머니랑 있느라 깜빡한 거겠지.
애써 감정을 가다듬으며 혜준은 오늘의 재수 없었던 일과 정신없이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는 것 그리고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었다는 것까지 하루를 모두 적어 채팅방에 띄워 보냈다.
7.
이틀째 유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 어제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 1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혜준은 계속 연락을 취했지만 유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애도 아닌데 다 큰 성인이 잘 지내고 있겠지, 유진을 믿으면서도 혜준은 걱정이 됐다. 연락이 없는 유진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혜준은 업무 내내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한 건지 혜준은 어느새 퇴근 길이었고 보고서를 위해 꺼낸 노트북 앞에서 애써 집중을 하려 애썼다. 새벽 2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겨우 자료 정리를 끝낸 혜준이 전기장판을 켜 두지 않아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웠다. 휴대폰으로 흘깃 시선을 돌려보아도 핸드폰은 꺼져 있는 듯 조용했다.
그리고 새벽 3시, 혜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8.
유진은 길을 건너다 떨어트린 핸드폰이 박살이 났고 주말이라 핸드폰을 개통할 수가 없어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혜준은 안도했고 며칠 후, 유진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말이 되자 피곤할 유진을 배려해 서울로 올라가려 했던 혜준을 말리고 유진이 세종으로 내려왔다.
어?
문을 열고 들어온 혜준이 유진을 보고 뱉은 첫마디였다. 아무리 주말이어도 혜준을 만날 때면 포마드를 고집하던 그가 웬일로 포마드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웬일로 머리를 내렸네요?"
"나보다 내 머리가 먼저 보여요? 서운하네."
서운함을 표현하려는 듯 입술을 한번 삐죽인 유진이 혜준을 한번 안고는 들고 있던 주황색 쇼핑백을 건네 주었다. 혜준을 위한 선물이었다. 혜준은 선물 사올 시간에 핸드폰이나 잘 간수하라며 유진의 등짝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둘만의 시간에 혜준과 유진은 혜준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무엇인가를 보고 나면 항상 후기를 전하던 유진이었기에 크레딧이 올라가자 혜준은 유진이 말을 꺼내길 기대하며 목을 축였으나 유진은 혜준이 재밌게 봤는지 물어보고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유진은 요리를 해주겠다며 냉장고를 뒤졌고 텅 빈 냉장고에 왜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냐며 당장 마트에 가자고 채근했다. 혜준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방에 쏙 들어가 채근하는 유진의 잔소리를 피하느라 잊어버리고 말았다. 출장에 운전에 피곤했으리라. 이 날 유진의 요리는 아주 맛있었다.
9.
그 이후로 혜준은 유진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유진은 뭔가 묘했다. 항상 깔끔히 올리고 다니던 머리는 내린 머리일 때가 대부분이었고 뮤지컬이나 전시를 즐기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의 후기는 자세히 보면 상투적인 말뿐이었고 했던 말의 반복이었다. 자신과 하던 깊은 대화는 어디로 갔는지 후기를 남기는 유진은 어쩐지 의무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유진에 혜준은 인터넷 검색창에 '애인이 질린 거 같을 때'를 검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점은 일부였을 뿐 유진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유진과 혜준이 다시 만났을 때, 혜준은 얼굴을 잘 보지 못하는 장거리 연애 탓이라고 생각할 만큼 유진은 다정했고 그대로였다. 유진은 간만에 서울로 올라온 혜준을 호텔로 데려갔다. 일종의 이벤트라나 뭐라나. 혜준은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고 하면서 싱글벙글 웃는 유진을 보며 누굴 위한 이벤트인지 고민하다 이내 자신을 안아 올리는 유진에 생각을 멈췄다. 밤은 길고 길었다.
다음 날 아침, 떨어지는 물소리가 혜준을 깨웠다. 혜준은 기지개를 피려다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혜준은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진을 밀어내야 했다고 생각하고 다음엔 결코 밀어내리라 다짐했다. 물소리가 끊기고 잠시 후 유진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나왔다. 혜준은 똘똘 말린 이불 속에서 유진을 조용히 째려봤다.
"혜준, 왜 그렇게 봐요? 내가 너무 섹시한가?"
"내가 언젠가 한유진을 두들겨 패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보고 있었어요."
"응? 그런 게 취향이에요?"
유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혜준은 말을 말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잔뜩 찌푸려진 혜준의 미간에 유진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혜준이 눈을 뜨자 어느새 유진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었다. 혜준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유진의 덜 말린 머리에서 물방울이 혜준의 얼굴로 떨어졌다.
혜준이 웃으며 유진을 장난스럽게 밀어내자 유진은 오히려 힘을 주고 버텼다. 일부러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기도 했다.
"아니 그만, 강아지예요?"
혜준이 하하하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진의 정수리 쪽을 쓰다듬자 혜준의 손끝에 금속같이 딱딱한 것이 걸렸다. 작은 신음성의 소리를 낸 유진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혜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디에 부딪히는 바람에 아프다는 것이 이유였다. 혜준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진의 정수리를 살펴보려 했으나 유진은 금방 가라 앉을 거라며 걱정말라 하고는 옷을 입고 오겠다며 혜준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유진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혜준도 이내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혜준은 병원을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스러운 말을 건냈지만 유진은 괜찮다며 걱정해줘서 고맙다며 혜준을 끌어안기나 했다. 은근슬쩍 침대로 가려던 유진의 등에 혜준의 빨간 손자국이 난 것은 혜준이 자신과의 다짐은 잘 지키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얼얼한 등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두고 가는 혜준을 따라갔다.
10.
점심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나가서 먹자며 자신 끌고 나가는 신입 사무관에 혜준은 얼떨결에 청사 뒷골목의 가게로 끌려왔다. 물론 신입 사무관과 죽이 잘 맞는 박수종도 함께였다. 아 박수종이랑 밥 먹기 싫은데, 혜준은 둘 외에 다른 사무관도 함께인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혜준은 제육볶음인지 당근볶음인지 모를 음식을 뒤적거렸다. 수종과 신입 사무관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수종이 구매했다는 휴머노이드가 주제였다. 전에도 한참을 떠들더니 결국 사긴 했나 보다.
"사무관님 그러면 에페일 거 사신 거예요?"
"어, 에페일. 아니 H로 시작하면서 H가 또 묵음일 건 뭐야? 무슨 에르메스야? 아 뭐 아무튼! 저번에 유 사무관이 거기 거가 좋다고 했잖아. 와, 진짜 좋던데? 처음 만들었다니 뭐가 다른긴 한가 봐."
"더 자세히 얘기 좀 해주세요. 저 진짜 고민 중이란 말이에요. 하, 그낭 확 지를까요?"
"질러, 질러! 가정용 로봇 하나 들인 거 같은 수준이 아냐. 진짜 사람 같아. 너무 사람 같아서 가끔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 옵션도 진~짜 많아서 뭐 사람 음식 먹을 수 있게 하는 옵션도 있고 그렇던데? 아 근데 충전은 좀 불편하더라. 충전하는 게 무슨 나만 하다니까? 뭐 내가 해줘야 되는 건 없긴 하지만."
"근데 다른 회사도 다 그 정도 크기래요. 정수리 쪽으로 충전한댔나요? 아 이건 모델 버전마다 다른가?"
"뭘 어디로 해요?"
"뭐야, 이 사무관도 여기에 관심 있어? 충전 말이야. 되게 큰 충전기로 정수리 쪽에 꽂아서 충전하거든? 와, 근데 머리카락 때문에 티 하나도 안나. 만지면 그때야 '아 여기구나' 싶은 정도? 그리고 한번 하면 엄청 오래 가는 거 같더라고."
"맞아요. 한번 완충하면 이틀은 그냥 간대요."
정수리 얘기에 혜준은 유진을 떠올렸다. 휴머노이드 얘기에 사람인 유진을 생각하는 것이 한편으론 웃기기도 했지만 다쳤던 게 걱정스러웠다. 점심 먹고 들어가며 한번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혜준은 생각했다.
"아 근데 확실히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긴 해. 뭐 집에서 드라마나 예능이나 보잖아? 어떠냐고 물어보면 되게 형식적인 말만 해. 프로그램 된 게 그런 것뿐인가 봐."
"그래도 사무관님이랑 대화하다 보면 더 학습해서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요?"
"그런가? 내가 아직 오래 안 써봐서 그럴려나. 어어, 다들 밥 다 먹었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 커피 마실거지?"
혜준은 수종과 신입 사무관의 대화에서 유진의 모습을 발견했다. 언젠가부터 전시회 등을 다녀오고 나서 묘하게 얕고 형식적이던 그의 후기는 딱 수종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질감. 수종은 이질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혜준 또한 유진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혜준은 며칠 전 유진과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손에 느껴지던 금속같이 딱딱했던 무언가,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 상황이 게임이었다면 혜준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혜준은 게임 캐릭터가 아니었고 이 상황에 대한 공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실의 혜준은 공략집이 간절했지만 현실이 그런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청사로 돌아가는 길, 혜준은 자신을 휘감은 꺼림칙한 느낌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11.
그 날 저녁,
혜준은 집에 돌아와 유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점심의 꺼림칙한 기분은 어느새 휘발되어 날아간지 오래였다.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에 깜빡 잊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오늘도 바빴다고요? 항상 바쁜 거 같은 건 내 착각인가요?”
“아마 아닐걸요? 요즘은 계속 바쁘네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밥은 먹고 일하는 거 맞아요? 저녁 또 대충 먹은 거 아니죠?”
“고모가 반찬 좀 갖다 주셔서 괜찮아요.”
“점심은요?”
“밥 챙기는 거 보니까 한국 사람 다 됐네…. 사무관님들이랑 같이 제육볶음… 먹었어요. 유진씨는요?”
“저는….”
한국 사람이라도 된 듯 밥을 챙기는 유진에 혜준은 점심의 그 꺼림칙한 기분을 다시금 떠올렸다. 혜준은 그 기분을 떨쳐버릴 겸, 진심 반 장난 반으로 유진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유진 한씨는 지금 뭐하고 계세요?”
“누워서 이혜준하고 통화하는 중이죠?”
아.
혜준은 무엇인가 잘못 됐음을 느꼈다. 혜준에게로 돌아온 그 때부터 유진은 Eugene Han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유진 한이기는 했지만 한국식의 한유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이유일까, 유진은 혜준이 유진 한이라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혜준이 화가 났을 때 꼭 유진을 유진 한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혼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유진이 혜준이 유진 한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혜준의 머리 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혹시나 제대로 듣지 못했을까 여러 번 유진 한이라고 불렀으나 유진은 태연했다.
이 사람은 한유진이 아니다.
통화를 끊고 혜준은 확신했다. 그 어떤 논리도 혜준의 확신을 설명하진 못했지만 그랬다. 정확히는 하나의 논리는 그랬지만 혜준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한껏 뒤섞이고 꼬여진 생각의 꾸러미들이 혜준의 머리 속을 장악하다 못해 바닥까지 늘어진 것만 같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혜준의 몸에 늘어진 생각 꾸러미에 미쳐 얽히지 못한 생각의 잔해들이 더럽게 떨어졌다. 혜준은 그렇게 무거워졌고 뒤섞이고 꼬인 생각은 풀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따금 정신을 차리는 것 만이 혜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전화통화로 뜨거웠다 이내 차가워진 혜준의 핸드폰엔 유진에게서 온 알람이 쌓여 있었지만 혜준은 쉽사리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혜준은 유진이 선물한 캔들의 주홍빛 불빛이 일렁거리며 혜준의 손부터 얼굴까지 감겨 들러붙는 것을 눈치챌 수도 없었다.
12.
혜준은 미칠 지경이었다. 혜준은 유진을 만날 때마다 유진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촉감, 온기, 말투, 항상 끼고 다니는 반지까지 유진은 정말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유진조차 있는지도 몰랐던 오른쪽 골반 뒤 편의 점과 무엇인가 읽을 때 오른손 검지로 책의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소한 버릇까지도. 하지만 혜준을 미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혜준이 느꼈던 이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정수리를 만지지 못하게 하는 유진에 정수리도 확인하지 못했다. 섹스를 할 때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몰아붙이는 유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만날 때면 대부분 섹스를 했기에 혜준은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중간에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 한가지 더. 혜준이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유진이 꺼리게 되었다. 이게 혜준을 가장 미치게 하는 점이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혜준을 환영하던 유진은 혜준이 서울로 올 때마다 자신의 집보다는 호텔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집에 간다 해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금지구역이 없던 혜준에게 금지구역이 생긴 것이었다. 도대체 왜? 잠긴 문 앞에서 혜준은 울고 싶어 졌다. 애써 무시한 그것이 정말 현실일까 봐. 그렇다면 진짜 한유진은 어디로 갔는가? 왜 나를 두고, 나만 두고. 혜준은 한껏 뒤섞이고 꼬인 생각의 꾸러미들이 점점 풀려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진실을 보기엔, 그러니까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확인하기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점점 풀려가는 생각꾸러미를 혜준은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모순적이게도 혜준은 유진과의 관계와 사랑에서 그 어떤 불확실함이라도 없기를 바랐다. 난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하니까. 나는 우리의 사랑 또한 사랑하니까. 하나의 의심조차 없기를. 혜준은 얽히고 꼬인 생각꾸러미를 풀기보다 그냥 가위로 잘라 버리기로 했다. 너도 날 사랑하지, 그렇지? 이건 그냥 여러 우연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우연일 거야.
13.
혜준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유진이 됐든 유진의 집이 됐든 유진의 모든 것을 말이다. 유진과 식사를 하기 위해 나가며 혜준은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까지 놓치지 않았다. 혜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운데에 H가 있는 로고가 박힌 우편물이었다. 혜준은 지난번 수종과 신입 사무관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무관님 그러면 에페일 거 사신 거예요?"
"어, 에페일. 아니 H로 시작하면서 H가 또 묵음일건 뭐야?"
저것은 분명 에페일에서 온 것이리라, 혜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혜준은 유진을 떠보기로 했다. 에페일을 들어봤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기재부에서도 에페일 제품을 산 사람이 많다면서. 유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잘 알죠. 제가 거기 투자했어요. 지금도 주주고."
"아... 그래요? 말 하는 거 들어보니까 뭘 처음으로 했다 던데."
"아 가정용 로봇을 인간형으로 만들어서 가정용 휴머노이드로 만든 게 최초였죠. 이렇게 대박이 날지는 몰랐지만?"
하하하. 유진이 맑게 웃었다. 유진은 종종 소년처럼 밝고 맑은 웃음을 짓고는 했다. 유진의 것 중에서 혜준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기도 했다. 지금 혜준 앞의 웃음은 혜준이 좋아하는 바로 그 웃음이었다. 저런 것까지 같을 수 있나? 혜준은 에페일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14.
혜준은 검색창에 에페일을 검색했다. 혜준의 예상대로 유진의 집 우편함에 꽂힌 H 로고는 에페일의 것이었다. 에페일(Hepeil), 본사는 기술·대장장이·금속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아의 합성어였다.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회사라는 걸 어필하려 만든 이름인 듯했다. 홈페이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허기술과 세운 실적들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나열 되어있었다. 혜준은 에페일이 판매하고 있는 모든 휴머노이드 상품을 뒤졌다. 수종이 말한 것처럼 다양한 옵션이 있었다. 그러나 외형은 정해져 있었다. 여러 이유로 실존 인물과 똑같은 얼굴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저가 의심하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풀려가던 생각의 꾸러미가 다시금 얽혀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사람과 똑같이 만든다 하더라도 휴머노이드가 실제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유진의 업무 특성 상 요즘 수준의 AI라면 대체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혜준은 머리 속으로 무수한 물음표를 쏟아져 냈다. 모니터 속 끊임없이 써 있는 상세 페이지의 스크롤을 내리다 혜준이 스크롤을 멈췄다. 수종이 정말 크다고 했던 충전기에 대한 것이었다.
본 제품의 충전기는 매우 크니 구매 전 상세 사이즈를 꼭 확인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아 충전기.
혜준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가능하고 말고를 고민할 필요 없이 혜준은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들을, 그 조각들을 잘 조립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혜준은 자연스레 유진의 집 안 잠겨진 문을 떠올렸다. 다른 방은 모두 보았으니 그 방을 확인해보면 뭐라도 나올 게 분명했다. 설령 그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도 혜준은 문을 열어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감정과 생각의 덩어리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혜준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난 후, 맞닥뜨리게 될 것과 만나게 될 진실 그리고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자신까지. 코 끝에 느껴지는 아릿한 감정에 혜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물을 참기 위해 감은 눈이었지만 혜준은 어느새 떨리고 있는 어깨에 눈을 떴다. 지금까지 애써 꾹꾹 눌러 담아왔다고 생각한 감정들에 오히려 혜준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창 밖의 야경에 눈이 부셨다. 빌딩 위 붉은 불빛들은 혜준에게 경고라도 주는 양 점멸했다. 눈물에 빛들이 흐리게 보였다. 혜준은 핸드폰의 알람이 울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2022년 xx월 xx일
혜준 자요?
나는 잠이 안와서 잠깐 산책 중 오전 01시 03분 1
15.
혜준은 기회를 노렸다. 유진은 출장이 잦았으니 또 출장을 갈 것이다. 유진이 출근한 사이 유진의 집에 간다 해도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로운 유진이 언제 집에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혜준은 확실한 기회를 기다렸다. 오래가지 않아 -혜준에겐 아주 길게 느껴졌지만- 유진은 홍콩 출장 일정이 잡혔다. 유진이 떠나는 일정에 맞춰 혜준은 기다렸다는 듯 휴가를 내고 유진의 집으로 향했다. 물론 유진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서울로 가는 차엔 혜준 혼자였지만 차 안은 혜준의 생각과 감정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조악한 덩어리들로 차 있었다. 정신없이 운전해가니 어느새 신호등 하나 없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수십개의 신호등이 혜준을 멈추게 하고 또 가게 했다. 유진의 집 주차장에서 혜준은 차에서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또 하고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드나든 유진의 집을 머리 속으로 그리고 그렸다. 혜준의 상상 속에선 단 하나의 문만 열리지 않았다. 유진이 그 문을 잠그고 갔다는 가정 따위를 생각할 틈 따윈 없었다. 혜준은 그 문을 열어야만 했다. 우리의 사랑을, 너를 그리고 나를 확인하기 위해.
겨우 차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혜준은 현관문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너무나도 익숙해서 두려운 유진의 집으로 들어 갔다. 달라진 것은 없다. 혜준만을 위해 유진이 사다 둔 어두운 붉은색의 실내화는 현관 앞 한 켠에 위치했고 혜준이 짧게 해외 연수를 갔을 때 기념품이라며 사온 마그넷은 여전히 유진의 주방 디자인을 한껏 망치며 존재감을 뽐냈으며 유진의 체취 또한 그대로였다. 혜준은 곧장 문제의 그 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문은 닫혀 있었다. 혜준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 재낄 듯 문고리에 손을 얹었지만 손을 얹은 채로 혜준은 주저 앉았다. 손이 하얘질 만큼 문고리를 쥐어 잡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게끔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혜준의 눈가는 이미 벌겋게 올라왔다. 문을 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그 커다랗고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내가 아는 유진의 방이길, 자신을 휴머노이드로 의심해서 에페일을 찾아보고 자신의 집에 몰라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진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바보같은 생각을 한 자신을 놀려주길. 혜준은 바라고 또 바라며 일어나 문고리를 돌렸다. 혜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고리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혜준을 눈을 감았다. 잔뜩 긴장한 탓에 손은 차가웠고 식은 땀으로 흥건했다. 문이 열리고 눈을 뜬 혜준은 뜨거운 숨을 뱉었다.
혜준과 마주한 것은 H 로고가 박힌 커다랗고 차가운 기계였다.
처참했다. 말 그대로 혜준은 처참한 기분이었다. 혜준에게 늘어져 있던 한껏 뒤섞이고 꼬인 생각의 꾸러미들이 혜준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너무 무거워 혜준이 차마 버틸 수 없을 만큼, 그렇게 혜준을 짓눌렀고 혜준은 항복했다. 작은 혜준의 몸은 커다란 그 기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항상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유진이, 그리고 그의 집엔 시린 냉기만이 가득했다. 냉기로 가득 찬 집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혜준의 뜨거운 숨과 떨어지는 눈물뿐이었다.
어떻게
네가
날 두고.
16.
서울에 도착한 것은 오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주차장에서, 그리고 문 앞에서 시간을 끈 탓인지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주황색으로 오묘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감정의 심해에서 부유하며 가라앉고 있던 혜준은 기어이 자신을 현실로 끌어올렸다. 혜준은 힘이 있었다. 두렵더라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언젠가 유진이 자신도 닮고 싶다 언급하기도 했던 그런 힘이. 혜준은 오늘만큼은 그 힘이 원망스러웠다. 지금 앞으로 전진하면 날카로운 가시 같은 진실들에 혜준은 베이고 찢기며 넝마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준은 나아가야겠다. 진짜 유진은 어디로 갔는지, 왜 저런 휴머노이드를 내 앞에 갖다 놓은 건지, 정말... 정말 날 떠난 건지. 혜준은 벌개진 눈으로 석양이 점차 유진의 집을 채우는 것을 보며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 구석구석마다 유진과 함께 한 추억이 혜준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자신이 유진에게 갈치조림을 해주었던 주방, 씻을 때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진에 항상 잠그고 씻었던 화장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던 거실, 온기를 나누던 그 모든 곳까지. 혜준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으로 뭘 해야 할까. 어디서 한유진을 찾아야 할까. 언제부터 그리고 왜 저 휴머노이드가 유진을 대체한걸까. 미국 출장 당시 잠시 연락이 끊겼을 그 때일까. 혜준은 벌떡 일어나 H 로고가 그려진 편지봉투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서재의 서랍 한쪽에서 혜준은 찾아낼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웬 아날로그인가 싶었더니 보증서 따위의 서류 같은 것뿐이었다. 혜준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에페일의 본사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유진과 연락이 끊겼던 그 때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걸 혜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국에 가야겠다. 가서 뭐라도 됐든 간에 알아내야겠다. 설령 그것이 나를 울리고 끔찍하게 망가뜨린다 하여도. 무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혜준은 무작정 미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17.
혜준은 유진에게 한마디 말없이 휴가를 받아 미국으로 향했다. 모으고 모은 휴가였지만 짧은 시간이었기에 혜준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경유를 거쳐 산호세 국제 공항에 내리자 꽤나 따스한 햇빛이 혜준을 반겼으나 혜준을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유진의 연락이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정확히는 유진인 척하는 휴머노이드겠지만. 혜준은 곧장 에페일로 향했다. 혜준의 걸음에는 막힘이 없어 보였지만 가서 뭘 해야 할지 무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유진이 그 곳에 투자를 했다고 했으니 유진의 이름을 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유진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게 혜준은 탐탁치 않았지만 온통 유진으로 가득 찬 머리 속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실 혜준은 유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다. 자신을 두고 갔다는 분노일까, 슬픔일까, 배신감일까. 확실한 한 가지는 걱정이었다. 유진이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혜준은 유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또 공항에서 에페일까지 가는 그 긴 시간 동안 수십 개의 시나리오가 혜준의 머리 속에서 집필됐지만 모든 결말이 말이 안 되거나 혜준이 인정하기 싫은 결말이었다. 아니 그냥 혜준은 아직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제 연인이 자기랑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를 자신이랑 바꿔 치기 하고 홀랑 사라져 버렸어요. 미쳤냐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었겠다. 누가 제 말을 믿어 줄까. 혜준은 차라리 눈과 입을 닫고 자신의 감정과 사념에서 부유하기를 택했다.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리라. 달리는 차 안, 이국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국적인 언어들 사이에서 혜준은 철저히 혼자였고 이번에도 혜준은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던 것도 현실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에페일 본사 앞.
혜준은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 커다란 건물 앞에서 혜준은 작게만 보였다. 혜준은 잡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날 떠난 이유는 듣지 못하더라도 이곳에서 무엇인가 유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아주 작은 티끌 같은 진실이라도 들을 수 있기를. 혜준은 속으로 기도하며 발을 디뎠다. 자동문이 열렸고 혜준은 에페일 안으로 사라졌다.
18.
혜준은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데스크의 친절한 직원-혜준은 이 직원이 휴머노이드라는 것을 직감했다.-은 유진 한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오셨군요.' 라는 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혜준을 가장 높은 층을 데려갔다. 아무런 소개도 없었지만 혜준은 이곳이 CEO의 방임을 알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직원은 웃음과 함께 퇴장했다. 혜준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방은 의외로 포근하고 밝은 분위기였다. 따뜻한 아이보리 색의 러그는 부드러웠고 올리브색 소파는 푹신했다. 책상 위엔 작은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책상 주인의 취향이리라. 아늑함을 주는 방 인테리어에도 혜준은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손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CEO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할 말까지. 무엇이 있으니 자신이 이 곳까지 바로 안내받아 온 것이겠지. 혜준은 비행기 속에서 저가 그린 수십개의 시나리오 외의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고 또 바랐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혜준은 굳은 표정으로 여자를 맞이했고 그는 목소리만큼 밝은 얼굴이었다. 혜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는 자신을 아벨이라고 소개했다.
"에페일의 CEO, 아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제가 맞혀봐도 될까요? 혹시 이혜준씨?"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죠?”
아벨은 혜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놀란 혜준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 에페일의 CEO가 제 이름을 알고 있는가. 머리가 복잡했다. 혜준이 예상한 시나리오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유진 한 때문에 왔다고 하셨죠? 그 사람 때문에 알죠.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게 이혜준씨 때문이었으니까요."
밝게 웃던 아벨은 굳은 표정으로 책상으로 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유진의 투자가 간절했어요. 돈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도운거구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뭐, 이해 해달라는 건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혜준씨가 눈치 채면 이 곳으로 당장 날아올 거라고 유진이 그랬었거든요. 오래 안 걸렸네요?"
혜준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카운터였다. 혜준은 아벨의 말을 이해하기는 커녕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 결국 혜준이 겪은 모든 상황들이 유진이 만든 것이고 심지어 혜준이 캘리포니아로 날아와 에페일에 있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유진의 계획 안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네가 왜. 혜준은 울컥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손을 가슴께를 눌러야만 했다. 아벨은 여러 서랍을 뒤지더니 붉은 봉투 하나를 혜준에게 건냈다. 붉은 색, 빨강, RED. 왜 하필 붉은 봉투일까. 이 색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잖아. 혜준은 아벨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가 유진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혜준의 눈빛은 복합적이었다. 이내 혜준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를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이건 또 뭐죠?"
"그 안에 답이 있어요."
20.
나의 전부인 혜준에게.
안녕, 이혜준.
한유진이야. 갑자기 반말을 쓰려니까 어색하다.
항상 너와 반말하는 사이가 되고 싶었어.
너가 반말을 하는 사람은 가족 밖에 없었잖아.
그래, 나는 너의 가족이 되고 싶었어.
(물론 존댓말을 하는 이혜준도 섹시해서 좋았어!)
너가 이 편지를 보는 일이 절대 없으면 해.
이 편지를 너가 보고 있다면 그건... 내가 너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뜻이야.
아, 정말 이 편지가 너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선택을 해서 미안해, 사랑해.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건 뭔가 이상한 걸 알았다는 소리겠지?
우리 똑똑한 이 사무관님을 영원히 속일 수 있다면 정말정말 좋을텐데.
할 수만 있다면 이걸 소원으로 빌고 싶어.
생일 소원으로 빌어볼 걸 그랬나 봐.
아벨을 만났어? 아벨을 너무 원망하지마.
난 내가 해오던 일을 또 해버리고 만거야.
상대의 약점을 쥐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드는 일 말이야.
결국 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내가 모든 걸 망친 거야.
너를 만나기 전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이 짓 뿐이었어.
이혜준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지.
정말 고마워.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너가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뜻이거든.
너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시 울고 있다면 차라리 참지 마.
넌 항상 참아왔잖아. 내 앞이니까 울어도 돼.
다 내 과오야.
너를 만나기 전 내가 했던 짓 때문에 망한 회사의 사장이
감옥에서 나왔대. 이걸 출소라고 하는건가?
감옥에 있는 그 시간 동안 나를 원망해왔대, 나를 죽일거래.
협박 편지를 받았어.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너한텐 말할 수 없었어.
그 사람은 가진게 많은 사람이었거든.
난 그를 피할 수 없을거야.
그 사람은 아주… 위험해.
이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게 좋아.
자칫 너도 위험할 수 있거든.
그래서 내가 이 선택을 한 거야.
너를 지키는 선택을.
사랑해.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이혜준이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나랑 똑같은 휴머노이드를 만들면서까지 너의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길 바랬어.
내 죽음 후에도 우리는 함께 할 거야.
너가 준 반지를 휴머노이드에게 넘겼더니 손이 너무허전하네.
이건 이혜준의 분신 같은 건데.
혹시 나한테 화가 났을까? 그렇겠지?
너를 달래 줄 수 없어서 너무 슬프다.
나의 사랑이 삐뚤어져서 미안해.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사랑해.
바보 같은 한유진이
P.S.) 제발 날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찾지 마. 네가 사랑하는 나의 마지막 부탁이야.
널 지키고 싶어.
19.
봉투를 받아 든 혜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문고리에 혜준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아벨이 혜준을 불렀다.
"아 혜준씨. EG.H-001은 혜준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도 좋아요. 마무리는 저희가 할 테니까요. 봉투 안에 제 명함도 있으니까 결정하고 메일 주세요."
"E... 뭘 말씀하시는거죠?"
"아 이건 시리얼 넘버라... 유진 한 휴머노이드 말하는 거예요. EG.H-001"
EG.H-001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