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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크루아상

written by. 제이

  아담하고 깔끔한 외관의 빵집은 성북동 주택가 초입을 오랜 시간 지켜온 터줏대감이었다. 혜준이 하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큰하고 맛있는 냄새가 기분 좋게 훅 끼쳐왔다. 입구 근처에 있던 트레이와 집게를 자연스레 집어드는 걸로 보아 한 두 번 이 가게에 온 게 아닌 듯하다. 하지만 진열대를 시계 방향으로 쭉 훑어보던 혜준은 이내 배터리가 나간 로봇처럼 자리에 우뚝하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크루아상 찾으시죠? 아까 작가님이 남은 거 다 사가셨어요!”

  “아..”

 

  카스텔라 가루가 묻은 크루아상. 이 집 빵은 전부 맛있지만 혜준이 가장 좋아하는 건 부슬부슬한 촉감의 그 빵이었다. 그럼 뭘 사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혜준은 오늘 메뉴가 파스타라는 것을 떠올리고 이제 막 나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게트 한 덩이를 트레이에 올렸다. 그 사람은 아마 크루아상에 정신이 팔려 바게트는 생각도 못했을 테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돌려받아 지갑에 넣는데 앳돼 보이는 점원이 입을 달싹였다.

 

  “저..배우님 싸인 한 장...”

  “아..”

 

  커다란 머플러로 얼굴을 눈 아래까지 가린다고 가렸는데 눈썰미가 좋은 점원은 가게 단골인 배우를 단번에 알아봤다. 혜준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자 카운터 아래에 놓아두었던 다이어리를 재빠르게 펼쳐 펜과 함께 건넸다.

 

  “성함이?”

  이름인지 별명인지 알 수 없는 두 글자를 알려주고 점원은 능숙하게 빵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싸인을 마친 혜준이 펜을 다이어리 사이에 꽂아 돌려주자 바게트가 담긴 종이봉투가 딱 알맞게 손에 들어왔다.

 

  “감사해요, 배우님. 진짜 팬이에요!”

  “네, 수고하세요.”

 

  빵집 소녀의 발그레한 볼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혜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길을 나섰다. 간밤에 겨울비가 온 터라 거리는 물기를 머금고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후-하고 입김을 불자 뽀얀 숨이 공중에 흩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품에 안은 빵의 온기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5분 정도 골목 안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그 집’이 보였다. 혜준은 매번 올 때마다 세월의 흔적을 품었지만 잘 관리된 이층집이 꼭 그 주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Beep-. 대문 앞에 도착해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누르자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방문객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단번에 문을 열어줬다. 몇 개 되지 않는 돌계단의 절반쯤에 올라섰을 때 맞은편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이가 보였다.

 

  “왔어요? 얼굴이 꽁꽁 얼었네! 또 빵집 들렀죠? 내가 샀다고 연락한다는 게...”

 

  이헌은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잔뜩하며 혜준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었다.

 

  “이건 뭐예요?”

  “바게트는 깜빡하셨을 거 같아서요.”

  “맞아요! 이 배우 줄 크루아상만 잔뜩 사들고 나온 거 있죠.”

 

  자신의 허술함을 들켜버린 게 부끄러운지 이헌은 눈도 못 마주치고 머쓱하게 웃었다. 정작 혜준은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의 미소가 오늘따라 해사하다는 생각만 했다.

 

  “다 됐으니까, 손만 씻고 와요!”

 

  실내에 들어선 혜준은 외투와 가방을 알아서 정리하고 널따란 집의 일층 어딘가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자 찬 공기에 얼었던 피부가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수건에 물기를 닦아내고 거울을 보며 혜준은 오늘 무슨 얘기를 나눌지 기대감에 살풋 웃음이 났다. 하지만 부풀었던 마음은 식탁을 보자마자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이헌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감에 가득 차 내놓은 음식이 원인이었다.

 

  “이게...뭔가요?”

  “두부면으로 만들어 봤어요! 이 배우 촬영 중이니까,”

  “파스타 해주신다고,”

  “응! 두부면으로 만든,”

  “파스타.”

  “?”

  “작가님이, 파스타 해주신다고 해서, 그래서...이번 주 내내 풀떼기만 먹었단 말이에요!”

  “아..알겠어요! 바로 해줄게요!”

 

  하아, 이혜준 좀 참을 걸. 이헌이 저를 위해 고민한 메뉴였을 텐데. 허둥지둥 프라이팬을 다시 집어드는 사람을 보며 혜준은 순간 욱하고 질러버린 스스로가 창피해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소스 많이 해놔서 면만 삶아서 볶으면 돼요!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물어 볼 걸 그랬다. 그쵸?”

 

  그러면서 이헌은 요즘 촬영은 어떤지, 힘든 건 없는지 계속 말을 덧붙였다. 찰나의 순간이더라도 혜준이 무안해하거나, 불편해하거나,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배려였다. 이러면 어떻게 당신을 안 좋아하고 배겨. 혜준은 이헌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하면서도 어딘가 뿌루퉁했다. 낯부끄러우니까. 좋은 점만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 못난 모습을 들킨 거 같아 되려 틱틱거렸다. 그마저도 이헌은 다 받아주었다.

  소스에 맛있게 어우러진 스파게티 면이 프라이팬에서 그릇으로 옮겨졌다. 먹음직스러운 로제 파스타가 제 앞에 놓이자 그제야 혜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삐졌던 아이가 화가 풀린 것 같은 표정에 이헌도 미소를 지었다. 대신 두부면으로 만든 퓨전 요리 두 그릇은 오롯이 그의 차지였다.

 

  “맛있으세요?”

 

  우물우물 잠시간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던 혜준이 이헌의 몫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응, 맛있어요! 먹어볼래요?”

  “그럼 저도 한 입...”

  혜준은 사양하지 않고 손을 뻗어 겉보기엔 페투치네 같은 두부면을 조금 덜어냈다. 작은 입에 호로록하고 자신이 만든 요리가 들어가자 이헌은 조금 긴장하는 듯 했다.

 

  “어때요?”

  “맛있네요..”

  “그쵸? 후회할 정도로,”

  “그 정도는 아니에요.”

 

  또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쳐내도 이헌은 뭐가 좋은지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누구에게나 저 사람 좋은 미소를 넘실넘실 퍼주겠지. 혜준은 조금 심술이 났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의 동경의 대상인 배우 자신이야말로 만인의 연인이었건만, 이헌이 저한테만 웃어주고 저한테만 친절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요즘 들어 견디기가 힘들 만큼 샘이 났다.

 

  “아, 지난번 연주회 갔다가 이 배우 이름으로 싸인 받아왔어요.”

  “정말요?”

 

  얼마 전 혜준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스케줄 때문에 못 갔던 것을 아쉬워했는데 이헌에게서 그 연주회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근데...누구랑 가셨어요?”

  “응?”

  “혼자 가시진 않았을 테니까...”

  “아..”

 

  뜬금없는 질문에 행간을 헤매던 이헌은 꿈벅꿈벅 눈만 깜빡이다 혜준의 되물음에 이해를 한 듯 했다.

 

  “누구랑 가긴요...혼자 다녀왔죠. 이 배우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다녀온 걸요. 표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저 때문에 티켓팅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연주회를 부러 발품 팔아 다녀왔다는 거잖아. 갑자기 입맛이 확 돌 정도로 혜준은 이헌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웃음이 새어 나올까봐 스파게티 면을 돌돌 말아 입안에 가득 넣었다. 핑크빛 소스가 입가에 살짝 묻은 건 이헌만 봤을 테다.

  이후 혜준은 사탕발림에 넘어간 아이처럼 자신의 근황을 조잘조잘 풀어냈다. 그릇에서 파스타가 줄어들수록 버석했던 말간 볼에는 윤기가 돌았다. 와인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하는 거 같았다. 오랜만에 탄수화물을 먹어서 그런가. 음식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 때문이었을 거다.

  두 사람 모두 접시를 깨끗이 비우자 혜준은 빈 그릇을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이헌이 재빠르게 혜준이 손에 든 식기를 낚아챘다.

 

  “가서 피아노 치고 놀아요.”

 

  자상하지만 단호한 태도에 혜준은 고개만 끄덕이고 물러섰다. 고집을 피워봤자 이헌은 혜준이 손에 물 묻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마루로 나오자 커다란 창가 앞에 놓인 피아노가 보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비싼 값을 주고 사들였다던 악기는 이헌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저 인테리어 소품이 되었다고 했다. 되팔까 싶었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아 훗날 이 집안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놔두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거다. 어쩌다 혜준처럼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손님이 오면 악기에 숨통이 트이곤 했다.

 

  “피아노 이 배우 줄까요?”

 

  언젠가 이헌이 물었다. 하지만 혜준은 이 집에 잘 어울리는 악기라며 단 번에 사양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자기 재력으로도 살 수 있고. 무엇보다 혜준이 피아노를 받지도 않고 장만하지도 않았던 건, 이 피아노가 이헌의 집에 놀러 올 수 있는 구실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이라도 같이 하면 모르겠지만, 이헌은 요즘 좀처럼 혜준에게 제안을 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노는 혜준이 이헌을 만날 수 있는 좋은 핑계였고, 이 집에서 이헌 다음으로 좋아하는 존재였다.

 

* * *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5년 전 혜준이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혜준은 이미 그 때 연기경력 20년의 배우였다. 아역부터 시작해 신동이라고 불리며 중학생 때 출연한 영화로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받은 베테랑. 그렇게 평생 승승장구하며 스타로 살아갈 줄 알았건만, 어느 날 시작된 슬럼프는 혜준의 발목을 잡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교복을 입거나, 납작한 캐릭터만 연기한 게 문제였다. 꾸준히 작품을 해왔지만 어째 들어오는 배역들이 하나 같이 비슷했다. 지나친 이미지 소비는 대중들의 흥미를 앗아갔고, 설상가상 혜준의 성격과 태도가 도마에 올랐다. 어린 나이부터 유명세에 시달리며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즈니스로 만나다 보니 혜준은 평범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 서툴렀다. 살갑지 않다는 건 유독 ‘여배우’에게만 날카로운 잣대가 되었고, 제작사와 광고주 모두 혜준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배우로서의 인생은 여기까지인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네 가족과 살며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왔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돈도 얼마 모으지 못했는데. 사촌 마리는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다고 했지만, 혜준은 연기를 하지 않는 삶이 상상되지 않았다. 배우로 살아가는 게 가진 것 없는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차기작이 오랜 시간 정해지지 않아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헌이 혜준에게 작품을 제안해 왔다. 전 국민이 아는 저명한 국문학자를 아버지로 둔 작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차근차근 히트작을 써온 이헌은 자신의 다섯 번째 작품에 주연도 아닌 조연 캐릭터로 혜준을 추천했다. 지금까지 맡아 왔던 배역과는 전혀 다른 중성적인 느낌의 냉철한 인물이었다. 제작사 대표부터 막내 보조작가까지 모두 이헌의 선택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혜준을 고집했다.

 

  “왜 혼자 나와 있어요?”

 

  크랭크인을 앞두고 감독부터 스태프까지 모두 모인 회식 날이었다. 혜준은 이런 자리가 항상 불편했다. 더구나 회는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도 아니었다. 결국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밖으로 몰래 나와 얹힌 속을 달래고 있는데 전화를 받느라 나와 있던 이헌의 눈에 띈 거다.

 

  “들어가기 싫으면 같이 편의점 가요.”

 

  웬만하면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걸 꺼렸는데. 혜준은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이헌을 따라나섰다. 그와는 캐스팅 직전 미팅 때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맥주와 삼각 김밥을 나눠 먹으며 혜준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어렵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놀라웠지만 그보다 궁금한 게 있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는 왜 혜준을 택한 걸까.

 

  “이 배우가 그랬잖아요. 옳고 그른 건 상대적인 게 아니라고.”

 

  일전에 인터뷰에서 혜준이 스태프들을 대신해 처우가 열악한 촬영 현장에 대해 언급한 걸 본 거다. 이헌은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이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고 했다. 혜준은 속으로 그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실망하실 일만 남았네요.”

  “?”

  “제가 배우를 하는 건...결론적으로 전 좀 남다르고 싶었어요. 뭐가 됐든 시시해지기 싫었거든요. 작가님이 생각하신 것만큼 대단한 애 아니에요, 저.”

 

  기대는 일찍 무너뜨릴수록 좋은 거니까. 한창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혜준은 오랜만에 자신을 좋게 봐준 사람에게 조차 센 척 선수를 쳐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이제 이 사람과도 어색해질 일만 남은 건가. 씁쓸하게 내뱉었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이헌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객관적으로 이 배우가 남다른 성취를 이룬 건 맞잖아요. 시시하지 않아요. 대견해요. 아니, 존경해요.”

  “...”

  “저보다 이 일을 오래했고 잘 버틴 선배잖아요, 이 배우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평가였다. 감독이든, 팬이든, 기자든 모두 혜준의 불우한 배경과 ‘상품성’에만 주목했는데. 이헌은 혜준이 일궈낸 다른 면을 비추고 있었다. 뜻밖의 위로에 눈물이 울컥하고 차올랐다.

 

  “나야 말로 햇병아리죠. 대본이 이해가 안 되거나, 왜 이따위로 썼는지 따지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이헌의 우스갯소리에 피식하고 웃으며 혜준이 눈가를 훔쳐냈다.

 

  이후 혜준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 쌓아왔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주연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을 덜고 촬영에 임했고, 다른 사람에게 빈틈을 보이는 게 쉬워졌으며, 배우와 스태프를 가리지 않고 동료들이 많아졌다.

  종종 이헌과는 통화를 하며 대본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밤이든 새벽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헌의 집에서 만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한 작품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고, 혜준이 다시 일어서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다음에도 이헌과 혜준은 영화 한 편과 드라마 한 편을 더 했다. 허재 감독이나 한상민 피디 같은 함께 합을 맞췄던 동료들과 얼굴을 보는 날이 많아졌고, 어느 날부터 단 둘이 만나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업계에서나 대중에게나 혜준은 이헌의 가까운 지인이라 여겨졌고, 두 사람도 나이 차이만 열 살 넘게 날 뿐 서로가 서로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정과 동료애라는 이름으로 5년 동안 이어져온 관계가 조금씩 모양을 바꾸기 시작한 건 작년 여름이었다. 혜준은 그 날도 이헌이 만든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밀려와 거실 소파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잠에서 깨 눈을 떠 보니 이헌이 소파 아래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 일어난 걸 알릴까 하다, 혜준은 모로 웅크린 채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경을 낀 옆모습으로 언뜻언뜻 이채가 도는 눈빛이 보였다. 단어 하나, 글 한 줄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턱에 힘을 줬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이헌의 표정에 웃음이 났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나. 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갈한 뒷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목에서 이어지는 저 까끌까끌한 머리칼을 만지면 무슨 느낌이 들까.

  위잉-. 날벌레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혜준의 생각도 끊겼다. 모기였다. 이헌도 불청객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혜준은 자는 척 눈을 꼭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이헌은 여전히 혜준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모기를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양손을 번쩍 들어 휙-하고 마주치려다 오류가 난 기계처럼 동작을 멈추고는 팔을 휘휘 내젓기만 했다. 손뼉이 마주치는 큰 소리를 내면 혜준이 깰 테니까.

  한참을 그렇게 허공에 손짓을 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등을 돌리고 혜준의 발에 입김을 후-하고 불었다. 발등에 모기가 앉았었나 보다. 이헌의 입김이 닿았던 곳이 화끈해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작은 움직임에 그는 흠칫 놀라며 혜준이 깼을까봐 다시 등을 돌려 말간 얼굴을 쳐다봤다. 혜준은 또 한 번 자는 척 눈을 꼭 감았다. 손 끝, 발 끝, 눈꺼풀. 온 몸의 말단에 힘을 꽉 주고 이헌이 저를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던 걸 잠들어 못 본 척 했다.

  드르륵. 조용히 테이블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천천히 눈을 뜨니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헌이 저 멀리 부엌을 향해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제야 ‘짝’하고 손뼉이 마주치고, 물로 씻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잡았나보다.

  잠시간의 소동 후, 집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다시 졸음이 찾아왔다. 눈을 감은 혜준은 분명 아무 것도 안 보여야 하는데, 이헌이 잔상으로 남아 계속 어른거렸다. 오래 품어왔던 마음에 싹이 터버린 건, 그 날이었다.

 

* * * 

 

  요즘 혜준은 한창 드뷔시의 곡을 연습 중이다. 식탁 정리를 마친 이헌이 크루아상과 함께 따뜻한 차를 피아노 근처 티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검지로 위를 가리킨다. 자신은 서재에 올라가 글을 쓰겠다는 뜻이다. 혜준은 건반 위의 손을 멈추지 않고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은 혜준의 연주를 가까이서 감상하지 않았다. 굳이 글이나 다른 일을 핑계로 자리를 피해줬다. 피아노와 단 둘이 편하게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혜준이 혼자 노는 건 길어 봐야 한 시간 정도다. 좋아하는 곡과 연습중인 곡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건반을 두드리다가 충분하다 싶으면 젓가락 행진곡이나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곡을 쳤다. 심심하니 이헌에게 나와 놀자는 거다.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운 아이처럼 일부러 뚱땅뚱땅 건반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면 이헌은 그 엉망진창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잠시 감상하다 씨익 웃으며 일층으로 내려왔다.

 

  “당분간 못 와요..”

  “바쁜 건 좋은 거예요.”

 

  돌아갈 시간이 되어 짐을 챙기던 혜준에게 이헌이 크라프트지로 포장한 음반을 건네며 말했다. 스케줄 때문에 한 달 동안 못 본다는 데도 이헌은 아쉬운 기색이 없다. 혜준은 자신이 못 보는 새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 사람의 빈틈을 누군가 파고 들까봐 조바심이 났다.

 

  “다음 달에 화보촬영 갔다 오면,”

  “언제든, 이 배우 오고 싶을 때 와요.”

 

  기약이 없어도 이헌은 이 자리에 있겠다는 거였다. 그제야 혜준은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택시가 골목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헌은 대문 앞에서 배웅을 했다. 시선을 앞에만 두던 혜준은 택시가 코너를 꺾기 전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서 있는 흐릿한 인영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 * * 

  한 달 동안 생방송에 가까운 드라마 스케줄을 마치고, 혜준은 화보 촬영을 위해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생긴 여유 시간에 그림 같은 풍경 속을 걷고 있자니 이헌이 떠올랐다. 지금 그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을 잔뜩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거 같아요.]

 

  너무 티를 냈나. 이국의 정취에 취하면 사람은 평소에 없던 용기가 생기기도 하니까. 혜준은 더 이상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곧 이어 도착한 이헌의 답장에는 자신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꼭 같이 가요.]

  [한국 도착하면 바로 가도 돼요?]

  [그럼요. 김치찌개 해줄까요?]

 

  이헌도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한 거 같아 혜준은 신이 났다. 마음 같아선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을 앞당기고 싶었다. 귀국 날짜가 하필 발렌타인데이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후 인천에 도착해서는 바로 성북동으로 향했다. 긴 비행시간 때문에 피곤했는데도 이헌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하지만 혜준이 도착하기 삼십분 전, 이헌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문자를 남겼다. 대체 무슨 일이지. 부엌에는 자신을 위해 정갈하게 차려진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보였다. 저녁상까지 다 차려 놓고 어디를 간 걸까. 혜준은 주인도 없는 넓은 집에 혼자 있자니 오늘 따라 이곳이 스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없이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누르고 있는데 철컥하고 이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왔는지 숨소리가 거칠다. 품에는 크루아상이 들어있을 게 분명한 종이봉투가 보였다. 이 추운 날 밖에 오래 있었는지 얼굴에는 바람이 묻어 찬 기운이 완연했다.

 

  “석현이가 잠깐 왔었어요.”

  “김 대표님이 왜요?”

  “요즘 좀 힘든가 봐요.”

  석현은 이헌의 대학 동기이자 영화 제작사 대표였다. 혜준도 이헌과 함께 종종 만난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지만 달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셋이 있으면 은근히 이헌과 함께 한 세월을 강조하며 능글맞게 구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근데 왜 작가님을 찾아와요...”

  “그러는 이 배우는 오늘 왜 왔어요?”

  “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농담이에요.”

 

  혜준의 반응이 귀여운지 이헌이 크게 웃었다. 이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게 좋은가. 뚱한 표정을 숨기지 않자 이헌은 얼른 뒤에서 혜준의 어깨를 붙들고 식탁 앞으로 데려가 자리에 앉혔다. 다 차려진 밥상을 두고도 여전히 수저를 뜰 기미가 안 보이자 이헌은 계란말이 하나를 밥 위에 올려주며 맛있게 먹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혜준은 더 삐져있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을 위해 뛰어왔던 이헌의 모습이 떠올라 숟가락을 들었다. 그제야 이헌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스며 과일 같은 후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두 사람은 부엌에서만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냈다. 혜준이 런던에서 보고 온 것들과 한 달 동안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 지잉-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혜준을 데리러 오기로 한 매니저의 연락이었다. 하필이면 내일 추가 촬영이 잡혀 혜준은 오늘 밤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매니저가 도착할 시간이 되자 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며 런던에서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이헌에게 건넸다.

 

  “이거 때문에 온 거예요?”

  “발렌타인데이였으니까요.”

 

  5년을 알고 지내면서 이런 기념일은 단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었는데. 의외의 선물 때문인지 이헌의 얼굴 위로 은은하게 미소가 퍼졌다.

 

  “고마워요. 다음 달에는 내가 사탕 챙겨줄게요.”

  “꼭이에요. 약속하시는 거예요.”

 

  혜준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이헌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감아 왔다. 엄지를 꾹 누르는 커다란 손에서 뭉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서로의 손이 잠시간 닿았다가 아쉽게 스쳤다. 별 거 아니었지만 이렇게 낯간지러운 스킨십을 하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혜준은 벅찬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볼이 빠르게 붉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던 찰나, 밖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렸다. 아, 조금만 천천히 오라고 할 걸. 마음이 초조해져 이헌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냅다 질러버렸다.

 

  “저 내일 촬영 끝나면 이틀 쉬거든요. 바다 보고 싶어요.”

  “같이 갈까요?”

  원했던 대답이었다. 혜준은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응, 데리러 갈게요.”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말에 혜준의 광대가 더 위로 솟았다. 이 순간 수줍게 웃는 건 오히려 이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언가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때 다시 한 번 경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알겠어, 갈게. 간다구. 이헌이 사 온 크루아상을 챙겨 들고 혜준은 대문 밖을 나섰다.

 

  “조심히 가요.”

  “내일 봬요.”

 

  벤에 올라타는 혜준을 향해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준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서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대신 품에 안은 크루아상이 담긴 종이봉투를 꽉 끌어안았다.

 

* * *

  다음 날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지난 밤 촬영장으로 오기 전 집에 들러 바다를 보러 갈 짐도 다 챙겨 놨고, 현장의 준비도 지연 없이 착착 진행 되었다. 날씨도 맑고, 감독과 동료들의 컨디션도 좋고. 이헌과는 아침에 일어나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대로라면 혜준만 잘하면 되는 날이었다.

  딱 세 장면만 촬영하면 됐고, 첫 씬을 깔끔하게 마쳤는데 현장의 분위기가 어딘가 어수선했다. 저 멀리서 매니저가 혜준과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다급하게 달려왔다. 표정만 봐도 무언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그 때 마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혜준아 어떻게 된 거야?”

 

  스캔들이었다. 혜준의 PR 에이전트를 담당하고 있는 마리는 방금 전 이헌과의 열애설 기사가 떴다는 사실을 전했다. 통화를 끊지 않고 뉴스를 찾아보는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파파라치로 유명한 매체가 지난 밤 혜준이 이헌의 집을 찾았던 순간을 포착해 기사화 한 거다.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가십 뉴스들은 그동안 이헌이 혜준에 대해 언급했던 인터뷰 중 자극적인 단어만 헤드라인으로 뽑아내 모든 걸 왜곡하고 있었다. 댓글의 반응은 안 봐도 뻔했다. '스폰서', '빽' 같은 혜준이 배우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루머들로 넘쳐났다. 이 모든 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마리야, 나 이 씬만 촬영하고. 다음 장면 사이에 텀 있으니까 그 때 같이 정리해서 발표하자. 빠르면 십 분, 길어도 이십분이면 돼. 알겠지?”

 

  혜준은 자신에게 흠집이 나는 것 보다 촬영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수많은 스태프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통화를 끊고 아무렇지 않은 척 현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평소였다면 수월하게 넘겼을 간단한 대사도 자꾸 발음이 새고 NG가 났다. 결국 촬영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마리와 다시 통화하기 위해 벤으로 달려가는 그 짧은 순간이 억겁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혜준을 맞이한 건 더 엉켜버린 상황뿐이었다.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아무 사이 아니니까,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지!”

  “그렇다고 나랑 상의도 안하고 이렇게 기사를 내면,”

  “아무 사이 아니잖아? 기자들은 계속 전화 오지, 댓글은 난리지...”

 

  마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이헌과 혜준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우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지. 근데 어제부터, 그리고 오늘 밤이 지나면 진짜, 정말, 어떤, 무슨 사이가 될 뻔 했는데, 그랬는데.

  혜준은 자신의 사소한 선택으로 이헌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거 같아 절망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수많은 대중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입장 표명보다, 지금 당장 이헌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순간 스피커 너머에서 마리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혜준아, 내 말 듣고 있어? 작가님도 입장 내셨다고.”

 

  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혜준은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클릭 끝에 마주한 화면은 ‘채이헌 작가’, ‘사실무근’, ‘아무 사이도 아니다’ 같은 단어와 문장들로 가득했다. 보도 자료를 통해 나온 이헌의 입장은 붙여넣기라도 한 듯 하나 같이 똑같은 어구와 표현들로 반복되어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혜준에게 그건 마치 어떤 선고 같았다. 시작도 못하고 이 관계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촬영은 우는 씬이었다. 감독은 크게 만족하며 OK를 외쳤다. 동시에 조연출이 힘차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며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혜준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그치기는커녕 엉엉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을 했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속이 끊어져라 울어댔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혜준을 겨우 달래 현장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놀랐다가 이 배우가 오늘따라 몰입을 크게 했나보다 생각하며 각자의 일로 무심하게 다시 돌아갔다. 아무도 몰랐다. 그 날 혜준이 운 건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그 순간 그렇게 펑펑 울고 싶어서 울었다는 걸.

 

* * *

 

  [보고 싶어요.]

 

  메시지를 보낸 지 벌써 열흘이 되어갔다. 그 날 이후 이헌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가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터폰 너머는 묵묵부답이었다. 혜준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마음고생을 하는 와중에 스케줄까지 소화하느라 혜준은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링거를 맞으며 마리에게 일부러 자신이 탈진했다는 기사를 크게 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누구 한 명 보라고. 하지만 여전히 이헌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혜준은 하다하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겁쟁이, 겁보, 쫄보.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끝내자. 평생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앨범에 저장해 놓은 이헌의 얼굴이 너무 미워 수없이 외쳐댔다. 그러다가도 그가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요동쳤지만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이헌이 보고 싶다.

 

  ‘형 절에 간다고 했는데? 요즘 글 쓰느라 조용한 데가 좋은지...’

 

  결국 상민에게 연락해 행방을 수소문 했다. 혜준은 망설이지 않고 운전대를 잡았다. 만나면 뭐라고 쏘아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잔뜩 생각하며 운전을 했다. 노을이 질 때 즈음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어느새 짙은 밤이었다. 사찰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문자를 보냈다. 십분 쯤 기다리니 멀리서 이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2주 만이었다. 그 사이에 야윈 건가. 혜준은 오면서 했던 생각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거칠어진 이헌의 안색을 걱정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헌을 쳐다봤다.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물러설 기세도 보이지 않자 이헌이 결국 앞장서서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혜준을 안내했다.

 

  방석을 깔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이헌이 따뜻한 차를 혜준에게 내밀었다.

 

  “찬 물 주세요.”

  “몸 안 좋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헌이 자신의 소식을 찾아보고 걱정했다는 사실에 혜준은 내심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섣부른 생각이었다.

 

  “이제 찾아오고 그러지 마요. 이 배우한테 안 좋아요.”

 

  또 다시 저만치 앞서 먼저 도망가는 이헌의 태도에 결국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정말 안 좋은지 알지도 못하면서.

  “책임지면 되지! 내가 연기할 수 있게 작가님이 작품도 꼬박 꼬박 써주고, 제작사에 나 캐스팅 하라고 압박도 하고, 정 안되면 제작비 투자도 하고, 그리고..그리고..”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며 억지를 부렸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는데 그만큼 혜준은 이헌이 간절해 끄윽끄윽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것도 좋은데요...당신이 날 안 좋아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혜준씨..”

  “혜준아요. 혜준아라고 불러 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쉬우면서 왜 저한테만 거리를 두세요?”

  “어려우니까요.”

  “...”

  “좋아하니까.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쉬울 수 있겠어요...”

 

  자신과 마찬가지로 눈이 그렁그렁 해져서는 눈물을 뚝뚝 떨구는 이헌을 보자 혜준은 더 이상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이헌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기우뚱하며 이헌의 등이 벽에 닿았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잡아당기지도 못하고 이헌은 그저 혜준의 손을 꽉 잡고 힘만 줄 뿐이었다. 잠시간 그렇게 꾹 맞닿았던 입술들이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나 진짜 너 평생 안 놓아줄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이헌이 올려다보며 묻자 혜준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이헌이 혜준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몸에 무게가 실리면서 혜준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거침없이 자신에게 파고드는 이헌을 꽉 껴안으며 까끌까끌한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아, 이런 느낌이었구나.

 

  피아노 보다 재밌고, 크루아상보다 맛있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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