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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번의 법칙

written by. 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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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은 꼭 세 번까지, 만세는 무조건 세 번.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였고,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었다. 한국인의 3 사랑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유구했다. 뭐만 하면 삼세번. 가위바위보는 삼세판. 

 국적에는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 거지 같은 나라에 버려진 이혜준은 삼세번 법칙을 너무 끔찍하게 생각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처음부터 대답하면 되지, 굳이굳이 두 번을 더 물어봐야만 본심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혜준, 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딱 반으로 갈렸다. 독종 아니면 천재. 정확히 말하자면 49대 51 정도. 나? 글쎄, 생존력이 좋은 사람? 정작 이혜준 본인은 삼십년 정도의 제 인생을 그 문장 하나로 요약했다. 타칭 독종 혹은 천재, 자칭 생존력 좋은 사람, 이 둘 사이의  거리가 하늘과 땅이었다. 

 길가는 사람 중 이혜준 안다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같은 꿈을 꾸고 있는 학생들은 선망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냥 어디서 이름만 주워들은 사람들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서 부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혜준이 누구냐하면 한국의 사진작가다. 직업 앞에는 '탑'이 붙고, 이름 석 자 앞에는 '파격', '이단아' 등등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붙는.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한국 사진계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존재였다. 

 그런 혜준이 날 때부터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던 건 아니었다.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긴 했어도 파격적인 정도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혜준을 잘 아는 사람이 보기엔 재능보다는 노력 덕이었다. 남들보다 세 배, 네 배 더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대학교 심리학과에서 4학기 내내 불변의 법칙처럼 자리하던 과탑이 돌연 자퇴서를 제출한 것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몇 달간 아무 소식도 없이 잠수를 탔다. 심지어는 쌍쌍바처럼 붙어 다녔던 사촌, 마리한테까지 편지 하나 남겨둔 게 다였다.

 이후 둘의 술자리에서는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너 그때 진짜 너무 했어. 알지, 내가 봐도 큰 잘못했어. 너 그렇게 잠수타고 나서 난 너 심리학과 간다는 거 뜯어 말렸어야했는데, 그 생각까지 했다니까. 뭐? 진짜야,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마리는 정확히 한 달 하고 열흘이 지난 날, 오후 3시 19분에 생존 신고를 받았다. 죽은 듯이 지내던 혜준이 생존 신고를 남긴 건 당시 전 국민 사용률 1위로 치고 올라온 메신저 어플도 아니었고, 전화도 아니었고, 심지어 싸이월드도 아니었다. 

 혜준이 선택한 건 500원짜리 우표가 하나 붙어있는 우편이었다. 이별도 재회도 다 편지였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울릉도에서 보냈다는 것. 마리야, 난 잘 지내고 있어. 곧 돌아갈게. 그게 전부인 글 옆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혜준의 사진 하나가 자리했다. 

 또 한 달하고 열흘이 지난 날에 팀플을 끝내고 터덜터덜 자취방에 돌아오던 진마리는 집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추운 날씨에 코 끝이 빨갛게 얼어붙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겨울 최강 한파 속에서 꼼짝없이 울기만 하던 마리가 입을 연 건 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난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눈물 속에서 녹아가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낸 혜준이 살짝 눈짓하며 말했다. 마리야, 하늘 봐봐. 눈 와, 서울은 첫눈이지? 

 

 오늘부로 서울에 완전히 돌아왔다고 말하는 혜준의 목에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 하나가 걸려있었다. 혜준은 그 렌즈 뚜껑을 만지작거리면서 전과는 다른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사진을 찍을 거라고.

 

 또 한 달 하고 열흘이 지난 날에, 혜준은 공모전에 입상했다. 이혜준이 아닌 이해준이라는 이름으로. 왜 다른 이름을 쓰냐는 마리의 물음에 혜준은 그냥, 사진가로 새로 태어났으니까 이 이름은 내가 선택하고 싶어서, 라고 말했다. 

 

 혜준이 사진에 빠진 계기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카메라가 남기는 찰나는 영원히 보존된다는 게 좋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나만의 우주에서 이 순간은 영원으로 남으니까. 

 학연, 혈연, 지연, 이 셋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좁디좁은 사진계에서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혜준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유로웠으니까. 그 세 가지 인연에 묶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했다. 사람들은 그걸 파격이라고 불렀다. 

 이해준 이름 석 자가 신드롬을 일으킨 건 두 번째 작품이었다. 제리코의 정신병동 환자 삽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정신병동 연작. 파장은 엄청났다. 기성 사진작가들은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고 평했고, 누군가는 이게 진정한 사진의 존재 의미라고 평했다. 

 그러다가 ‘이해준’이 그 이혜준이라더라, 그 이혜준이 사진작가가 됐다더라, 하는 소식을 듣고 동기들은 모두가 놀라 자빠졌다. 당시 너 같은 인재는 꼭 대학원에 들어와야 한다며 학기 내내 저주를 퍼부은 모 교수 또한. 이혜준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하며 혀를 끌끌 차기 바빴다. 

 예술성이 짙은 사진을 찍던 혜준에게 이작가님의 세계를 좋아한다며 찾아오는 연예계 관계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은 마리의 동창이었다. 내 친구가 너한테 꼭, 꼬옥! 좀 맡기고 싶대. 손을 꽉 감싸고 간절하게 말하는 눈을 거절하기가 힘들어서 시작했는데, 작업한 프로필사진 하나로 신인이 엄청난 주목을 바데 되면서 헤준을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변화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과 엮이면서 종종 혜준에게 대시하는 배우들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좀 예외적으로 남았다. 짝사랑을 견디다못한 모 배우가 터뜨린 일방적 열애설.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처음으로 찍은 스타라 혜준에게 의미가 남다르단 걸 알고 기사를 냈다. 그리고 이해준 작가의 즉각 반박. 

 더해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는 걸 마리가 겨우 말렸다. 이걸 빌미로 공공연해졌다. 이작가의 공과 사 구분 능력. 진실은 진마리만 알았다. 혜준의 취향을 발톱만큼도 만족시키지 못했던 배우라 혜준이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다는 걸.

 소문 하나 잘못 퍼지면 아니 땐 굴뚝에서 그럴 리가 있냐며 매장 당하는 게 순식간인 판에서, 조심해야 할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념. 연예계, 운동계, 모든 셀럽을 통틀어 피사체로 걸릴 만한 사람이면 렌즈로만 쳐다보기, 사진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한 사적 관계 금지, 이혜준 인생 신조 1조 1항. 

 한유진과 이혜준의 첫 만남은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적어도 제삼자 진마리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랬다. 배경은 뉴욕이었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인물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린 혜준과,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후원하는 바하마의 한유진, 그리고 첫 조우는 시상식장 안. 

 

 한국인 사진작가가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온갖 유난을 다 떨던 나라를 벗어나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느슨해졌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영광이라 할 때는 언제고, 상을 맡겨놓은 듯 취급하던 터라 피곤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365일 중에 300일 넘게 붙어있는 걸로는 모자라?"

 "같이 여행하면 좋잖아."

 "좋지, 좋기야 좋은데, 어째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

 

 Lee Hae Jun, 원형 테이블 위 이름 석 자가 박힌 종이가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혜준이 모든 외국 출장마다 마리와 함께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무뚝뚝함을 빙자한 영어 울렁증. 처음 외국에 나갔을 때는 무슨 말을 하든 하하, 로봇같이 웃는 게 다였는데 요즘은 목석같이 딱딱히 굳어서 눈동자에 생기를 잃는 수준으로 변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상 수상 순서가 다가오니 손바닥이 긴장감으로 축축해졌다. 혜준이 정장 바지에 아무리 문질러도 없어지지 않는 땀을 걱정하고 있을 무렵, 넓은 홀 안에 혜준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예상을 못한 결과라 얼떨떨하기만 했다.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떨떨함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혜준을 일으켜 정신을 붙잡게 한 건 바로 옆에 있던 마리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상 위로 올라가는 혜준을 보며 열렬한 환호를 쏟아냈다. 

 혜준이 뉴욕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시상식이 세계 최고라 농담한 이유는 수상소감이 없다는 점이었다. 트로피 받고 끝나는 깔끔한 진행. 그리고, 바로 그날 인물 부문의 시상자로 나선 게 한유진이었다. 

 단상 반대편에서 대기하던 유진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고작 한 걸음인데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네모난 트로피를 건네는 손끝이 살짝 스친 순간에, 피복이 벗겨진 전선을 잘못하다 건드린 것처럼 찌릿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흠칫한 혜준이 트로피를 잡은 손을 말아쥐었다. 

 "축하드려요, 이혜준 작가님."

 아무리 지금이 지구촌 사회라고 했어도 낯선 타국 한복판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한국어에 단정한 머리통이 흠칫했다. 현지인처럼 유창한 한국어에 놀랐는지 벙긋거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한국분이세요?"

 "그렇게 보여요?"

 "네."

 

 한 손은 트로피를, 한 손은 꽃다발을 둘러 안은 혜준이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을 얼었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 복화술 능력을 시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갔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본 마리의 딴에는 대견해 보이는 사촌이었다. 

 "좀 의외네요."

 "네?"

 "다들 이작가님 말 없다고 그러던데, 아닌 것 같아서요."

 "⋯저희 만난 지 5분도 안 됐어요"

 

 날카로운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플래시가 터지고, 혜준이 단상을 내려가기 위해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 후, 애프터 파티에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 홀을 빠져나오다가 한유진을 또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작가님이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니까, 한국식으로 다시 이름이랑 나이부터 소개할게요.."

 "네?"

 "바하마 뉴욕부지사장 한유진입니다, 나이는 87년생 토끼띠."

 "한국분 맞죠?"

 "글쎄요, 그래서 이혜준 작가님은?"

 "제 신상이 필요하세요?"

 "그렇다고 보기엔, 구글에 치면 다 나오는 정보잖아요."

 "그럼 검색해보세요."

 

 딱딱한 반응에 유진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유진 딴에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거였지만, 혜준이 보기에는 조롱에 가까웠다. 혜준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한가득 찌푸렸다. 그 가득 묻은 불쾌함을 알아챈 유진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찾아볼게요. 그 정도 노력은 기꺼이 해야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작가님 눈에는 뭐 하는 거 같아 보여요?"

 "제 질문이 먼저 같은데요."

 "이작가님한테 수작 거는 중이죠. 다시 말하면, 이작가님한테 관심 있다는 뜻."

 혜준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아주 잘 알았다. 흥미를 풍선껌처럼 부풀리는 사람, 그걸 톡하고 건드리면 팡하고 터지는 사람들. 경험상 미친 척하고 대처하는 게 현명했다. 자켓 주머니 속에서 검지와 중지를 브이를 만들고는 눈앞에다 대고 휘휘 흔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몇 개 같아요?"

 "⋯두 개요."

 "제정신이시네요. 혹시나⋯⋯ 약하신 줄 알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하던 유진이 영문을 알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른 치아가 다 보일 정도로 시원스러운 웃음이었다. 배까지 접어가며 호텔 대리석 바닥에 웃음을 흩뿌리는 사람을 두고 혜준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중얼거리면서.

 두 번째 만남은 이틀 뒤, 

 이혜준 작가의 수상 축하 겸 뒤풀이로 명명된 그날의 모임 장소는 뉴욕의 중식당이었다. 누가 봐도 먹고 죽자는 뉘앙스를 풀풀 풍겼다. 평소 어색한 사람과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혜준은 이런 저런 핑계를 미리 준비해놨으나,  마리와 함께 가는 자리였기에 빠지기가 애매했다. 

 이작가님, 축하드려요. 난 이작가가 탈 줄 알았어! 술잔이 맞부딪히는 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룸 안에 온갖 소리가 뒤섞였다. 난장판 속에서 대충 분위기를 맞추던 혜준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술잔을 앞접시 쪽으로 기울였다. 피곤하다.

 "슬슬 나갈까?"

 마리가 고래를 숙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언제쯤 나올까 기다리던 말이 귓가에 들리자마자 반기는 기색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누가 봐도 따분해 보이는 얼굴 옆에서 부어라 비워라 마시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언제나 마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한, 지루함에 잠겨가는 혜준을 끌어내는 것 또한 마리의 역할이었다. 

 "바로 숙소로 갈 거야?"

 "우리끼리 한 잔 더 할까."

 "그걸 말이라고, 가자."

 둘만의 2차 장소는 새해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바였다. 어둑어둑하지만 살짝 들떠있는 분위기 속에서 바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둘 앞으로 술잔이 놓였다. 마리 앞에는 칵테일, 혜준 앞에는 위스키. 

 그렇게 마시고도 마리는 술이 술술 넘어간다며 한 잔을 꿀떡꿀떡 마셨다. 으어, 그 입에서 곡소리도 아니고 이름도 아닌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속에 꽉 들어찬 술을 내뱉기라도 하려는 듯. 진마리, 정신 차려. 여기서는 안 돼. 

 읍, 나 화장실-! 하는 마리의 목소리가 뛰어가는 신발 소리에 묻혀 멀어졌다. 유독 달린다 했지. 혜준에게 좋은 일만 생기면 자제 못하고 주량을 넘기기 능사였다. 오늘도 둘의 미래 술안주가 될 날 중 하나였다. 

 "이작가님?"

 

 누군가 혜준을 불렀다. 그것도 한국어로. 이 바 안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근데 도대체 누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등을 급하게 떠미느라 바테이블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놓은 언더락잔이 움직이는 팔꿈치에 부딪혔다. 

 뒤늦게 손을 갖다 대봤지만 헛수고였다. 바 전체를 울릴 파열음에 눈을 꾹 감은 혜준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의아함에 눈을 살며시 떴다. 

 "유진 한씨?"

 어찌할 새도 없이 바닥으로 향하던 잔이 남자의 손안에서 비스듬하게 걸쳐 있었다. 넘쳐흐른 술이 두 손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잔뜩 어수선한 타이밍에 벨소리가 둘 사이를 날카롭게 갈랐다. 혜준의 휴대폰이 들어있는 자켓 주머니가 아니라 정장의 안쪽에서. 

 "인사는 나중에 하고, 휴대폰 좀 꺼내서 귀에 대줄래요?"

 유진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꽤 오래 통화음이 이어졌음에도 끊지 않는 걸 보니 급한 전화인듯 싶었다. 주머니를 찾는 손가락이 살짝 셔츠 위를 살짝 스쳤다.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댔다.

 "Hello."

 바텐더가 내미는 휴지를 받으려고 한쪽 손을 떼어내자 소리가 작아졌는지 유진이 고개를 더 미끄러트렸다. 판판한 어깨와 딱딱한 휴대폰 사이에 손바닥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 사이로 휴지를 밀어 넣은 혜준이 손바닥에 힘을 살짝 주어 고개를 위로 올렸다.

 "All right, I’ll get back to you."

 혜준은 귀에 들어오는 영어를 뜻 모르는 팝송처럼 멍하니 듣고 있었다. 무료했다. 넥타이 무늬 개수나 따라 세다가 위로 시선을 살짝 들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마주친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누구도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전화기 맞은 편에서 더 이상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걸 먼저 깨달은 건 혜준이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두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뒀다. 잠깐 아쉬운 듯하던 유진이 시선을 내려 손에 묻은 휴지를 멀끔하게 털어냈다.   

 "이것도 의외네요."

 "네?"

 "독한 술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유진이 혜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시선에 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 입을 열려고 하는데  타이밍 좋게 마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마리의 시야에서는 혜준이 가려져 있던 터라 낯선 타인 앞에 혜준이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젖은 신발, 축축한 휴지, 서 있는 남자와 이혜준.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던 마리가 혜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때 그 시상식장,

 "그때 시상자님 아니야?"

 "맞습니다."

 

 대답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문제 해결을 위해 인사든 통역이든 사례든 뭐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한 가지 선택지가 빠졌다. 한국인이네, 접수. 

 "어머, 한국분이세요?"

 "생물학적으로는요, 바하마 뉴욕부지사장 유진 한입니다."

 

 여기서 마리는 변수로 작용했다. 이헤준의 취향을 유일하게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남학생들을 제 발밑에 깔아뭉갠 사람이 마리가 아니었던가,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그 짧은 순간에 잡아냈다. 

 "잠깐 대화 나누세요, 전 나가서 택시 좀."

 "제가 태워다드릴게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술 안 드셨어요?"

 

 호의를 가장한 흑심에 정반대의 반응이 도출되었다. 거절과 은근한 수락. 유진도 단번에 알아봤다. 마리는 제 편에 가깝다는 걸. 

 "이럴 줄 알고, 다행이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희는 택시 타고 갈게요."

 "이 동네 택시 잘 안 잡혀요, 계속 거절하면 제 가슴이 좀 아픈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혜준이 에둘러 거절의 말을 건네면서 마리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 손짓 하나가 백 마디 말을 대변했다. 나가서 택시 좀 잡아줘.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마리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뭐 하자는 거예요?"

 "이작가님한테 수작 걸고 있다니까요."

 "⋯수작이 좀, 같잖으시네요. 성의도 없고 재미도 없고."

 "Wow, 이건 진짜 상처인데."

 

 연극배우처럼 유진이 오른쪽 손을 가슴에 얹고는 눈가를 축 늘어뜨렸다. 웬만한 타격에는 끄떡없다 생각했는데 무방비 상태로 받으니 타격감이 두 배였다. 물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 

 "⋯"

 "들은 넘어갔을 지 모르지만⋯"

 "맹세코 없어요, 다른 여자는."

 

 마이클 잭슨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느릿느릿 뒤로 걷던 마리가 마지막 말을 듣고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문을 빠져나왔다. 그래, 저 정도면 합격. 택시를 잡는 대신 키패드를 꾹꾹 눌러 문자를 작성했다. 수신인은 혜준이. 내용은, [이혜준아, 나는 먼저 간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

 "뭐가 됐든 저랑 상관 없죠."

 "난 이작가님 자주 보고 싶은데."

 "그럴 일 없을 거 같네요."

 "나 신경 쓰고 있잖아요. 왜 애써 외면해요?"

 "제가, 한유진씨를요?"

 "네, 나한테만 벽을 세우고, 세우고, 또 세우고."

 

 완만했던 경사가 가팔라졌다. 그 끝에는 혜준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위태로움을 들키기 싫어서 애써 차분한 표정을 꾸며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관망하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래요?"

 "⋯내기요?"

 "우리가 6개월 안에 다시 만난다면, 그때 나랑 섹스해요."

 

 그러고는 씩 웃었다. 혜준이 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본 건 제가 들은 게 맞나 싶어서였다. 수십번 뜻을 다시 더듬어봐도 착각이 아니었고, 환청이 아니었다. 움찔거리는 입술을 감추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말이 안되나요? 난 된다고 생각했는데."

 "저한테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작가님 내 몸 좋아하잖아요."

 

 홈런, 유진의 말에 강하게 맞은 공이 혜준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사고회로가 잠깐 끊어졌다. 저걸 어떻게. 

 "아닌가?"

 "⋯안 좋아해요."

 "이것도 좀 상처인데, 작가님이 그렇다니까 그런 걸로 하죠."

 

 말과 달리 표정은 여유가 넘쳤다. 방황하는 쪽은 오히려 혜준이었다. 

 

 "한국인은 삼세번이잖아요. 딱 세 번째에, 이혜준 작가님이 좋아하는 내 몸, 전부 드릴게요. 이작가님이 원하면 이작가님꺼 되는 거죠."

 "⋯⋯"

 "난 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고 싶은데."

 침묵을 끝낸 혜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에 남긴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대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분명하게 새로운 국면이었다. 모든 걸 올인한 사람과 배팅에는 생각이 없던 사람. 둘 중 한 명은 대박이고 한 명은 쪽박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역대 최강 무더위가 예고된 그 날에 스튜디오로 출근할 때만 해도 이혜준은 이런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 약속의 유효기간이 2주 남짓, 정확히는 12일 남았을 때 말이다. 점점 그 약속의 존재가 희미해질 정도로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국의 기업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자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신을 덮쳤다. 중요한 건, 대부분이 꽃중년도 아니고 그냥 중년에 불과한 기업인들에게는 이런 반응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런 혜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마리의 말을 빌리자면, ‘미남 기근 현상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끝내주게 잘생긴, 그리고 완전히 이혜준의 취향인’ 남자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서류를 급하게 헤집던 혜준이 기업 이름을 보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바하마 코리아, 단어 하나에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덮쳤다. 다시 말하자면, 혜준은 그 약속을 거의 잊어가던 참이었다.

 몸을 휙 하고 숨긴 혜준이 구석에서 괜히 장비 점검을 핑계로 늑장을 부렸다. 있지도 않은 렌즈의 먼지를 털고, 컨셉을 또 확인하고, 화장실에 갔다 오고, 아무리 그래도 작업을 계속해서 미룰 수가 없었다.  

 렌즈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한쪽은 노골적이었고 한쪽은 사무적이었다. 돌아가는 렌즈를 직시하면서 유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엄지와 새끼만 펼친 채로 작게 흔드는, 약속의 의미. 

 결과물은 완전히 건질게 없었다. 집중력이 떨어졌으니 당연했다.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얼굴보다 큰 카메라라 표정이 가려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밥이라도 먹어야지 이 상태로는 뭘 할 수가 없었다. 

 "⋯점심 먹고 가겠습니다."

 평소 탑스타 팬클럽정도가 아니면 쉽게 보기 힘든 고급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밥차는 누가 보낸 거래? 바하마에서 보냈다는 것 같던데요? 귀로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비찜, 보쌈, 잔수성찬 같은 메뉴를 찬찬히 훑어보던 혜준이 집게를 들었다. 

 넥타이는 어디에 내던져 놓은 듯 단추 두어개는 풀어낸 셔츠 차림으로 삐뚜름하게 기대선 유진이 누가 보면 거의 다 먹은 듯한 식판을 가만히 보다가, 옆에 바짝 붙어섰다. 

 "작가님 좀 더 드셔야죠, 오늘 늦게 끝날 수도 있는데."

 식판을 쥐고 있는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왼쪽 팔꿈치를 가볍게 쓸어내린 유진이 한 손으로 식판을 들었다. 그 사소한 터치에 정전기가 피어올랐다. 유진이 먹을 사람을 대신해서 반찬을 이것저것 담더니, 제 앞자리에 식판을 내려뒀다. 

 "작가님, 앉으세요."

 "⋯⋯네."

 "왜 오늘은 집중 못하세요? 이작가님이 이런 분 아니잖아요."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죠."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혜준. 오늘도 휘말리면 안돼. 

 

 "그럼 이것만 대답해주세요. 그 동안 내 생각 안 했어요?"

 "안 했어요."

 "그래요? 난 밤에도 낮에도 작가님 생각나서 집중을 못했는데."

 명백한 도발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입꼬리까지 끌어올리며 웃는 얼굴을 보니 짜증이 솟구쳤다. 

 "오늘이잖아요, 우리 약속이 성사되는 날."

 "⋯진심이에요?"

 "이제 와서 무르고 싶다는 말투네요."

 "증거 없는 구두계약은 효력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밑지는 건 내 쪽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니죠."

 

 휘말리지 말자, 오늘은 안돼. 아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후끈후끈한 날씨처럼 가슴 속에서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동안 운동 더 열심히 했어요."

 "왜 그러셨어요."

 "이작가님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려야 하니까요. 

 "한유진씨가 그 좋은 거, 라는 얘기에요?"

 "네. 이제 이 셔츠 밑에 흥미가 생겨요?"

 "⋯"

 "그렇다고 말해요,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혜준이 엉덩이를 뗐다.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옆에 마리가 있었다면 아무래도 내 사진 인생 여기서 망한 것 같지, 왜 미국에 있던 남자가 한국에 와? 바하마가 뭐하는 회사인데? 질문을 쏟아냈을 텐데. 내뱉지 못한 감정이 머리 속에서 엉켰다. 쥐가 날 것 같아서 벽에 머리를 기댔다. 

 혜준은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던 남자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정말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데, 저 남자랑 한 번 자고 싶어. 내 신념을 이번 한 번쯤은 꺾고 싶을 정도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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