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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리고 이미

written by. 루크바트

:: 아직 [부사]

어원 - 아직<석상>

1.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

2.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

:: 이미 [부사] 

발음 - [이ː미] 

1. 다 끝나거나 지난 일

 “네가 유진…. 한유진이냐.”

 나직한 목소리에 유진은 고개를 들었어. 해 질 녘, 일부러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들어와 있었으니 누군가 부른다면 자신을 뜻하는 것일 테고 아는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애당초 유진 하고 이름을 명확하게 불렀잖아. 낮은 화단의 돌로 된 가장자리에 양 무릎이 세워지게끔 걸쳐 앉았어도 상대는 맨눈으로 확인하기에 분명 키가 작달막했어. 가로등 빛도 침범하지 않는 곳인데 신기하게도 마주 선 상대의 얼굴은 뚜렷했고 옷은 칙칙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

 대꾸조차 하지 않는데 그런 유진을 마주 보는 상대는 미동도 없어. 부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니, 부른 거 맞겠지. 떡하니 앞에 버티고 있잖아? 상식적으로 유진이 대답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야 상황이 이어지겠지만 눈만 깜빡였으니 의아한 침묵이 이어질 만도 해. 아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대답할 의무도 없고.

 사실…. 지금 유진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 대답하기 힘에 부쳤던 게 커. 흰 와이셔츠 목둘레선이 잔뜩 구겨져 옷깃 부분이 들뜬 채 맨 윗단추가 뜯어져 나갔고, 쿨그레이 색 니트 조끼 복부와 옆구리에 올이 나가 보풀이 일어났고, 어두운 남색 슬랙스 무릎과 바짓단은 어디를 빗자루 대신 쓸고 왔는지 지저분하고, 걷어 올린 팔뚝엔 날카롭게 그인 상처가 가득한 것도 모자라 주먹 쥔 손 뼈마디엔 피딱지, 입시울은 죄 터져서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었거든. 딱 봐도 거하게 주먹 다툼을 하고 온 꼴이잖아.

 유진은 타고난 덩치와 키 때문에 종종 어른일 거라고 오해를 받는데 따지자면 입고 있는 건 교복이었고 엄연한 학생 신분이었지. 눈빛이 강하니까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는 불리로 보이나 싶어 또 항변하자면, 뒤로 둘러맨 크로스백을 열어 거꾸로 뒤집어만 봐도 평소 행실이 증명돼. 연필과 형광펜, 색깔 볼펜 등지로 가득한 필통과 빽빽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공책, 줄을 너무 그어서 너덜너덜한 교과서가 우르르 쏟아질 정도로 착실한 학생인데…. 알지? 이런 건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거.

 저를 바라보는 창백하고 정적인 시선이 거둬지지 않자 유진은 먼저 고개를 내렸어. 불쾌하기보다는 뭐랄까, 불편하잖아. 너무 곧으니까 되레 으스스했거든. 게다가 말을 섞어도 별 소득 없을 게 뻔하지 않겠어? 예. 라고 하면 어디 사느냐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도움이 필요하면 경찰서까지 대동할 수 있다거나 돈 몇 푼 쥐여주면서 약국 가라고 하거나, 밥 먹었느냐든지 이런 쓸모도 필요도 없는 대답을 해줄 거 같고 아니오. 라고 하면 그냥, 그건 그거대로 귀찮게 할 것 같았으니까.

 앞에 선 인영(人影) 같은 상대는 시종일관 침묵하면서 마주 보고 서 있었어. 결국 불편하고 조용한 끈질김에 유진이 맞아요. 라고 대답하며 곧장 자리를 털고 다른 곳으로 가려 채비해 일어났지. 담배도, 술도, 마약도 할 줄 모르던 저는 지금 여기보다 더 조용하고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가야만 좀먹으려는 스트레스와 복잡한 심경과 기타 등등 부정적 감정을 소화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유진은 크로스백을 고쳐 메고 걸음을 뗐어.

 “04년 10월 30일, 오후 08시 44분. 한유진. 혹은 Eugene Han.”

 “…….”

 “사망.”

 저 말을 듣기 전까지는.

 

* * *

 

 

 열여덟 살이 된 지 인제 6개월하고도 18일 정도뿐이 안 지났는데? 무엇보다 앞선 사람이 누구길래 제 이름을 부르면서 죽었다고 하는 거야, 재수 없게?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유진은 당장 몸을 돌려서 눈을 부릅뜨며 어느 정도 빠져나왔던 골목을 되돌아왔어. 오늘은 거나하게 시비가 붙었던 거로는 일진이 풀리지 않을 모양이야. 내가 동양계라서 속이기 쉬워 보이나? 아니면 만만해 보이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인종이 다르니까 퍼붓는 저주야? 뛰어들듯이 상대의 멱을 홱! 쥐어 올리려고 했는데 웬걸, 한 자락도 잡히질 않았어.

 방금까지 제 눈앞에 있는 걸 봤는데 정신을 차리니까 한 걸음 물러나 있기까지 해. 이를 꽉 깨물고 다시금 달려들었지. 그래도 상대는 미동이 없고 유진 자신은 생뚱맞게 뒤로 물러나 있고를 열댓 번 반복했어. 그래, 소용이 없었다고. 그 무미건조한 얼굴에 약간, 아주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서.

 유진은 화가 나고 혼란스러웠어. 몸을 더듬거나 골목의 벽, 화단의 나무와 꽃을 만져도 지금 죽은 건지 아니면 죽을 거라는 건지 당최 이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촉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했고, 사망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까지 동요해서 바보같이 굴고 있다는 것도 다 이상했어.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지.

 아니, 무서웠다고 해야 할까?

 유진이 재차 양 주먹을 꽉 쥐고 치기 어리게 달려들었을 때 상대는 검지를 들어 공중에 한 일(一) 자를 그었고 가만히 집중해서, 노려보듯 들여다봤어. 순간 그대로 유진의 몸이 주르륵 바닥으로 추락했지. 본인 의지라고는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통제가 되질 않았거든. Fuck…! 유진은 힘없이 주저앉았고, 널브러진 모습으로 양손을 들어 얼굴을 푹 가렸어.

 “진정하고 들어.”

 “…….”

 “… 사망했으니 오늘 일러준 대로 곧장 데려가야 하는 게 내 일이지만, 너는 특이한 경우다. 명부가 사흘 전에 들어와야 하는 게 순리인데 너는 오늘 막 들어왔거든.”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서 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알에 굵은 눈물방울을 가득 차올린 채 상대를 올려다봤어. 대체 어떡하면, 이렇게 다짐이 줄줄 무너질 수 있을까. 오늘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페뷔스 역할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엄마가 동양인 여성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손실 없이 해결됐을 문제 하나로 흠씬 얻어맞은 걸 또, 또 목격한 날이었고 손을 댄 그 새끼도 자신도 만신창이가 될 만큼 폭력을 쓴 날이었고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새긴 날이었고…, 꿈을 버린 날이었거든.

 그런데 지금 나더러 죽기까지 하라고?

 “말도 안 돼, 이 봐요. 내가 왜? 그쪽이 뭔데 날 함부로 죽었다고 해요?”

 “… 생과 사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지금 나 그림자 있는데요? 나 안 죽었는데요?”

 “… 나와 동행을 해야지.”

 “내가 왜 죽어야 하냐구요!!!”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유진은 읍소를 했지. 태어나서 이렇게 소리 내 울어본 게 언제였지? 빨래 더미에 혹은 세탁기 뒤에 숨어서 엄마가 혐오성 폭행을 당하는 걸 지켜봤을 때? 아무것도 못 하고 덜덜 떨면서 귀를 틀어막았을 때? 혼자 울분을 토하듯 피아노를 두드리던 엄마에게 괜찮으냐 묻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

 …… 아니, 단 한 번도 크게 울어본 적 없었어.

 지켜보던 상대는 앞머리 없는, 아니 길어서 옆으로 넘긴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올렸어. 그는, 서양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가기 전 중간계의 심판자가 바로 밑에 두는 집행자. 동양에서는 이승과 저승에서 망자를 데려오는 차사이자 사자라 불리었지. 일직차사로 불리기도 했고 이따금 천사라고도 불렸어. 통상적으로 인간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고자 만든 함은, 이혜준.

 다쳤을 때 늘 울기보다 분노했던 열여덟의 아이는 혜준 앞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지. 힘이 없는 유진의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어. 오늘, 아니 오늘이 아니더라도 이 아이가 불행을 여러 번 겪었다는 건 봐서 알았어. 참고 참다가 터트렸다는 것도. 그리고 정말, 지금 이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게 의문투성이라는 것도.

 혜준은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서 순식간에 주저앉은 유진을 튕기듯 일으켜 세웠어. 죽음에는 기회라는 게 없지.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든 의문은 해결하고 다시 와야 할 거 같아서. 혜준은 다시 손을 까딱했고 곧 유진의 온몸 상처와 몰골이 씻은 듯 깨끗해졌어. 여지껏 펑펑 우는 건 멈춰줄 수는 없었지만.

 “알려는 주었다. 망자에게 알리는 건 의무라.”

 “…?”

 “그렇지만, 네 명부 도착에는 분명 의아함이 있어 곧장 대동해서 못 가겠다. 내가 다시 알아보고 돌아올 적에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주변 정리나 인사 같은 것들 말이야.”

 혜준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렸어. 어디서부터 짚어 봐야 할까. 어디서 혼선이 온 걸까. 실수일까? 그것도 아니면 셀 수 없이 오래전부터 해 온 일에 갑자기 생긴 시험이라도 되는 걸까. 이런 일은 드물고 드물어서 사례도 없는데.

 사실이 그래. 보통 기대 수명을 다한 망자이거나 평소에 크게 아팠던 망자라면, 자신 죽음을 받아들이기 수월한 편이야. 이미 인간계에서 숱하게 죽음에 대한 암시를 받고, 스스로 찾아서 짐작했을 거란 말이지. 그 외의 경우는 사망 선고를 내리고 데려가기 위해 망자의 마지막 기억을 들추면 되는데 열이면 여덟, 죽기 직전의 파편이 보이게 되어 있어. 열이면 둘의 경우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니까 죽었던 순간을 잘라 와 보여주면 되지만 이 아이, 유진은 없었거든.

 단순히 저승으로 넘어가기 싫어 성깔을 부리는 게 아니라 말마따나 죽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었어. 알다시피 유진은 오늘 주먹 다툼을 하고 엄마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도망간 것뿐이란 말이야. 그건 죽은 게 아니니까. 심지어 중간에 교통사고도 없었어. 그러니 저장된 순간도 없었고. 즉 유진은, 가만히 잘 있다가 뜬금없이 명부가 내려온 게 되는 거거든. 노련한 혜준이 머뭇거린 것도 당연했고, 동양이건 서양이건 죽음을 이다지도 확실하게 예고하는 법은 없어. 운명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유진은 계속 펑펑 울다가 멀어지는 혜준의 뒷모습을 보곤 이내 손이고 셔츠 소맷부리고 가릴 것 없이 급하게 눈가를 정리했어. 심호흡으로 어느 정도 사그라뜨리더니 곧 성큼성큼 혜준의 뒤를 따랐지. 크게 울었더니 아이러니하게도 카타르시스가 퍼진 건지 뭔지, 개운한 느낌이 살짝 들었거든. 저 이상한 존재가 말했던 걸 곰곰이 따져 보니까 반박을 하고 싶어졌기도 해.

 “만약 그 명부가 애당초에 잘못된 거라면요?”

 “…….”

 “나 안 죽는 건데, 죽는 거로 된 거라면요? 보상은 해주나요?”

 “…….”

 “주변 정리를 하고 작별 인사를 하라니. 완전 설레발이잖아요!”

 아까 서럽게 울던 애가 맞는지 뒤에 쫄래쫄래 붙으면서 또렷하게 쏘아붙이는 말이 정곡을 콕- 찔러. 일 처리 깔끔하고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혜준인데 지금 저 애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잖아. 그 말인즉슨, 저는 이런 특이 상황에 융통성도 없이 밀어붙인 게 되거든.

 게다가…, 어디서 왔어요? / 내 몸에 난 상처 그쪽이 치료했죠? 망가진 옷가지도 그렇고. /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하는 거 봐서는 귀신인가? / 이름이 뭐예요? 이름은 있어요? 따위로 종알종알 묻는 걸 보면 혜준은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지. 이젠 골목이 아니라 도로변 딸린 인도를 걷고 있는데도,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묻는 유진을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거나 똑같으니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자 가던 길을 멈춰서 입을 열었어.

 “그만 따라오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협박은 아니었는데 말이 그래. 저와 동행한다는 건 곧 저승을 가겠다는 말이잖아? 아까는 반항심 득실득실해서 대꾸도 하지 않고, 현재이자 미래를 알리니 길길이 날뛰더니만 지금은 무슨 변덕으로 이러는 건지. 결론은 따라오지 말라는 소리였는데 그 말을 들은 유진은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삐죽이더니 혜준의 코트 자락을 확 쥐어 당겼어. 어라? 아까는 안 만져졌는데 방금은 만져지니까 신기한 표정으로 금세 탈바꿈도 했지. 혜준은 유진이 왜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는지, 어떻게 한 번에 오디션에 합격했는지 알 것도 같았어. 표정 변화가 짧은 순간 무궁무진했거든. 하여튼 옷자락을 붙든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어.

 “…… 저 배고파요. 울어서. 엄청나게.”

 유진은 무언가 반응을 해줄 적까지 움직이지 않을 요량이었어. 아까는 먼저 동행 어쩌고 그랬으면서 같은 말을 이렇게 살벌하게 쓰다니. 반칙 아니야? 혜준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대답이건 행동이건 재촉하듯 코트 자락을 슬쩍슬쩍 당기기도 했지. 상대도 아까 저가 대답하기 전까지 앞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으니 같은 수법 배워서 돌려주는 거지, 뭐.

 아까처럼 손가락질 한 번이면 유진을 당장 집으로 데려다 놓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 유진의 얼굴이 동정표 사기 딱 좋은 표정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지 혜준은 순간 궁금했어. 동시에 뭐 이렇게 태세 전환이 재빠른 애가 있나 싶기도 했지. 멀리서 지켜보는 거랑 직접 마주하는 건 다르잖아. 그렇게 몇 초간 눈싸움이 이어지다가 혜준이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지.

 

* * *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블록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과 아직 문을 닫지 않은 24시간 운영 가게들의 간판만 환하게 빛났지. 하루만 지나면 핼러윈이라 거리에 벌써 관련 물건들이 장식된 모습도 보여. 이번에는 분위기 잡는답시고 달 초부터 호들갑을 안 떨어서 다행이었다고 창밖을 건너보며 생각하는 유진이야.

 둘이 도착한 곳은 파이브 가이즈 햄버거 레스토랑. 유진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 혜준의 코트 자락을 잡고 거의 조종하다시피 들어왔지. 베이컨 버거 세트를 시켜서 신난 유진과 아무것도 안 시키면 민폐이니 밀크셰이크 하나를 시키고 무덤덤한 혜준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어. 원래는 유진이 지갑을 통통 털어서 사주려고 한 건데 웬걸, 혜준의 지갑이 더 빵빵하더라고…. 엉겁결에 얻어먹게 된 유진과 가만 생각하면 제삿밥 차려준 건가 싶은 혜준이야.

 “귀신이 밥도 다 사주세요?”

 제삿밥 생각한 건 어떻게 알고. 혜준은 밀크셰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빨대로 휘젓고만 있었어. 영영 배가 고프지 않은 몸이고, 인간계의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해. 질문 이후에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대답 안 하고 넘기려던 혜준이 작은 한숨을 쉬었어.

 “비슷하지만, 아니야.”

 “아아. 그럼, 그림 리퍼?”

 볼이 빵빵해진 채로 다시 사신(死神)이냐 묻는 얼굴을 잠시 맞댄 혜준이 대답을 걸렀어. 아까는 죽상에다 울어서 잘 몰랐지만, 유진의 앳된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 본래 개구지고 능글맞은 성격이거든. 혜준은 저녁을 먹이는 것까지만 상대하고 헤어질 생각이었어. 인간도 아닌 저승의 존재랑 같이 있어봤자 좋을 것도 없고, 일단 애 돌보는 데는 소질이 없었거든.

 서양에도 저승의 개념은 있으니까 추측하는 게 틀린 말도 아닌데 설명하자면 하루가 부족할 게 빤하고 진지하기보다는 꼭 장난을 거는 듯한 말투에 왠지 대꾸하기 싫었던 것도 있어. 잠정적 긍정을 알아들은 유진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햄버거를 베어 물었지. 몇 번 오물오물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입가를 엄지 끝으로 정리하면서 덧붙였어.

 “혹시, 우리 엄마가 죽는 건데 나인 줄 오해하는 건 아니죠?”

 “… 뭐?”

 “만약 그런 거라면 더 이해 못 해요. 지금도 수긍한 게 아닌데, 우리 엄마 건드리면 절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평온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유진이 뱉은 말에는 뼈가 있어. 순간 가만히 있지 않으면? 하고 되묻는 마음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의아한 마음이 겹쳐서 혜준은 말하기보다 열심히 먹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지.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엄마가 죽을 수도 있을 거고, 죽을 것 같이 보였나? 나이와 맞지 않은 의연함이 보여서 혜준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어.

 유진의 모친은 남들이 보기에도, 유진 스스로 느끼기에도, 참 왜소한 사람이었어. 가늠하자면 꼭 눈앞의 이 사신이라는 기이한 존재랑 덩치가 딱 비슷했지. 엄마가 약한 사람은 아니야. 약하다면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해냈고, 그 결과로 모두가 버린 처지의 서로를 놓지 않고서 이만큼 같이 살아냈으니까.

 그렇지만…, 엄마가 모진 세상에 비해서 한없이 작은 사람인 것도 부정할 수 없었어. 스스로 죽는 건 못하더라도 가난한 이방인에게 한없이 차갑고 험난한 이 도시가 엄마를 죽일 수도 있다고. 아니. 저가 몰라서 그렇지, 삐끗하면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다고 종종 생각했으니까. 유진은 감히 자신할 수 없었어.

 침묵만 흐르고 있는데 으름장을 놓은 유진도 재촉하지 않았고, 혜준도 굳이 되묻지는 않았어. 무당도 아니고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과 거리가 멀었으니 혜준의 생각이 유연하게 흐르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해. 그것보다 아까 유진이 길거리서 막 조잘거리고 이 패스트 푸드 체인에 데려오기 전부터 혜준은 위에 전갈을 보내려고 상황과 문장을 정리하는 중이었어. 망자 한유진에 관해 정확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이야.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돼요?”

 “…?”

 “뭐든 좋아요.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어떤 인간에게 그림 리퍼를 만날 기회가 찾아오겠어요? 저 죽으면 일하시느라 더 대답하기 곤란할 거 아녜요.”

 그 두꺼운 햄버거를 어느새 다 처리했는지 포일을 구기며 유진이 한 톤 높게, 발랄하게 물었어. 혜준은 이쯤 되니까 유진의 상상력이 좋은 건지 너스레가 좋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 아까는 죽음을 금기어처럼 굴던 아이가 이번엔 꼭 죽을 걸 상정하고 말하잖아. 특히나 혜준의 근무 상황을 고려해서 지금 묻겠다는 발상이 참….

 자기 손가락만 한, 투박하게 썰린 웨지 프라이를 케첩에 찍어서 야무지게 먹던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본 혜준은 머릿속으로 한 번 쭉 정리하고선 괜히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밀크셰이크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가다듬었어.

 “나는 보통, 너희가 동양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더 많이 일했다.”

 “구분 짓는 걸 보면 방식이 많이 다른 모양이죠?”

 “과정만 좀 다를 뿐이야. 동양에서는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망자에게 죽은 이유를 알려준 뒤 저승에 동행하지만, 서양에서는 생을 다 한 망자의 혼을 몸에서 베어 수확한다. 그래서 동양은 차사라고 부르고, 서양은 죽음의 농부라고도 해. ……. 이런 시답지 않은 게 궁금했다고?”

 “많이 수확했어요? 그러니까…, 당신들도 실적이라는 걸 쌓나요?”

 “그런 건 없어. 내가 할 일이라 하는 것뿐이야.”

 물론, 오래 묵은 신일수록 차츰 앉은 의자가 높아지는 건 당연하지. 힘과 지혜가 축적되니까. 체계도 있어서 혼자 결정하거나 바꾸거나 돌이킬 수는 없지만. 이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어. 자기가 언제부터, 왜, 이런 죽음과 밀접한 일을 하는지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유진이 묻지 않았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처음의 질문에 혜준은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는지 순간 고민에 빠졌지. 겉으로 표정 변화가 없는 상대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유진만 평화롭게 웨지 프라이를 먹었어.

 대뜸 유진은 혹시 처음으로 데려간 영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어. 혜준은 몇 가지 기준을 세워보다가 근현대 기준으로 동물의 혼이었다고 대답했지. 유기견이었고,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주인을 찾아가 늘 그랬던 것처럼 지키려고 했었는데 수호령이 아닌 이상 영혼이 생에 개입하면 그 생에 하등 좋은 것이 없다는 걸 알려줬다고 말했어. 단순한 영이 수호령의 위치가 될 수도 없으니 괜한 화만 더 입히는 꼴이라고. 애초에 그 주인이 널 버렸으므로 네가 지나가던 차에 치여 죽은 거라고 설명을 해 줬음에도 그저 용서한다는 미련한 개의 혼 이야기를 마저 다 넘겨주었지. 유진은 잠시간 미간이 좁아졌어. 개들이 이유 없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불공평하다는 투정도 남겼어.

 이번에 유진은 제일 데려가기 힘들었던 영혼이 있었느냐고 물었어. 혜준은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지. 자식들을 장성시킨 노인이었는데 그 자식들이 각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노라고. 그래서 새로 생긴 아이들, 자신 손들을 또다시 장성시키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노동을 하다가 과로사를 하게 됐다고. 아직 내 손으로 커 가며 닳는 옷과 신발을 갈아 주지도 못했는데 왜 벌써 저승으로 가야 하냐며 며칠을 문지방에서 씨름했다고도. 유진은 그 손들의 부모, 즉 자기 자식들은 뭘 했느냐고 되물었고 혜준은 사회생활을 했다고 덧댔어.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유진은 미간을 좁히고 다 키워서 스스로 생활할 줄 아는 어른들이 고작 사회생활로 바빠 자기 자식도 돌보지 못한 거냐고 이죽거렸고, 혜준은 대답 대신 밀크셰이크를 마셨어. 아마 유진을 포함한 인간들은 모를 거야. 세상에는 몇 줄로 정리해서 결론짓지 못하는 경우가 파다한 걸. 설명을 친절하게 한 건 아니었지만 자식들은 노인을 무척 말렸거든. 그러면서도 한 켠으로는 안심했었고. 자신들이 바쁜 와중에 소중한 걸 대가 없이 돌봐줄 인력이 생기는 건 편리했으니까.

 다음에 유진은 기억에 오래 남았던 영혼이 있었느냐고 물었어. 혜준은 웬만해서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답해주었지. 유진이 왜냐고 묻자 혜준은 역으로 죽음에 사연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물었어. 방금 태어나 곧장 죽는 생명도 찰나의 사연이 있는 법이라고도 했고, 일이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기억하고 곱씹을 시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지. 유진은 혜준이 생각보다 훨씬 더 무감하고 무심하다고 결론 내렸어.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더니, 다 그렇지는 않은가 봐. 하긴 생을 사로 바꾸는 신인데 그럴 리가 없으려나?

 이야기를 다 듣고, 그 많던 웨지 프라이도 동이 났지. 혜준은 헤어질 때가 됐음을 알리듯 아직 가득 남은 밀크셰이크를 집어서 자리를 먼저 천천히 정리했어. 유진은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제가 만든 쓰레기를 다 걷어서 일어나 뒤를 따랐지.

 안에서는 음악 소리가 있었는데 밖에 나오니까 정말 고요해. 유진은 정적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더 말하고, 듣고 싶었어. 소음을 내고 싶었어. 아까는 연속적으로 불행이 터진 저에게 알 수 없는 저주를 퍼붓던, 불쾌한 무언가였던 상대에게 묘한 끌림을 느꼈던 거야. 여성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에로스적 이끌림 말고, -사신에게 에로스적으로 끌린다니, 현대 소설의 전신이라는 고전 소설에도 그런 소재는 별로 없지 않던가?- 호기심이 주체할 수 없이 끓었어.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부류와 분야는 좁은 편인데도 말이야.

 혜준은 그런 유진이 자꾸 서성인다는 걸 알아. 일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발이 묶인 듯한 느낌이야. 평소처럼 냉정하고 단호하게 이르면 되는 걸 계속 왜 이러고 있나 몰라. 굳이 정의하자면 부채감? 왜 빚진 느낌인지 혜준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 상사이자 윗분, 저를 관장하는 신에게 전해야 할 전갈은 유진을 돌려보낸 뒤에 보내려 했는데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잖아.

 형용할 수 없는 기류가 흐르는데 선수를 쳤어. 유진이 말이야.

 “저기.”

 저런 표정은 보통, 결과를 다 예측해 봤고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불구, 시도해보려고 할 때 떠오르는 긴장의 표정인데. 혜준은 내가 거절할 부탁이겠구나- 눈치를 챘어. 유진은 입술이 말랐는지 한 번 감쳐물더니 한 발짝 가까이 섰어. 저랑, 하루만,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되나요? 혜준의 눈이 조금 커졌지.

 “?… 무슨 소릴 해. 안 돼.”

 “부탁드릴게요. 해가 뜨면, 아니 해가 뜨기 직전까지만….”

 “안 된다고 했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절에 거의 뒤쫓아서 대답한 유진은 약간 씩씩거리고 있었어. 화가 난 게 아니라 설명을 못다 해서 답답함에 혼자 부아가 치민 경우야. 양손을 주먹 쥐고 어깨가 긴장되어 솟은 것만 봐도 그랬지. 혜준은 곧은 눈빛으로 가만히 유진을 바라보았어.

 “…… 망가진 채로 울거나, 그게 아니라도 참아내는 엄마 얼굴…, 지금 도저히 못 보겠단 말이에요.”

 자신이 없어요. 제발요. 하루만요. 해가 뜨면 더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유진은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몸을 낮춰 혜준의 코트 자락을 겨우 부여잡고선 애원했지. 지금은, 하고 상정한 것도 사실 어색해. 매일 어머니의 위태롭고 불안정한 감정을 살피고 받아들이며 살았거든. 차라리 익숙할 텐데 오늘은 맞닥뜨리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자기도 다쳤으니까.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자기도 다친 게 아직 회복이 덜 됐으니까.

 혜준은 미간을 좁혔어. 참 이상해. 정말 오늘은 계속 이상한 날이야. 처리해 본 적도 없고 지침도 없는 이상한 명부가 들어온 것도 그렇고, 고작 인간 아이의 부탁을 신의 몸을 한 저가 단박에 거절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동정심이라는 건, 사신/차사에게는 소용도 없는 감정인데 별안간 우유부단함이 발목을 붙들고 있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한참 유진을 쳐다보던 혜준은 서서히 그 손에서 자신 코트 자락을 빼냈어. 유진은 힘을 주는 듯하다가 이내 힘을 빼 버렸지. 이건 거절이야.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사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이랑 있어 주겠어? …… 아니지.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까? 내가 무슨 이유에서든 당장 깨어나야 하는데 안 깨려고 하니까 눈앞의 존재가 대신 신호탄을 올리는 걸까. 원래부터 혼자였는데 새삼 혼자가 무섭다고 나이에 안 맞게 칭얼거린 걸 보면, 분명 꿈인 것 같아. 유진은 서서히 고개를 더 숙였어. 지금 꿈에서 깨면 좋겠다.

 “앞장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를 또렷하게 파고들었어. 꽤 많이 숙인 고개가 곧장 쳐올려졌지. 약간 핑 도는 것 같았는데 그것보다도 집중해야 할 게 있잖아. 혜준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눈을 슬며시 감은 뒤에 한숨을 쉬듯 대답을 덧붙였어.

 “난 여기서 널 데려갈 곳이 더는 없으니까. 이곳 구석구석은 나보다 네가 더 훤할 거잖아. 그러니까 앞장서라고.”

 

* * *

 도착한 곳은 브루클린의 슬럼 거리였어. 생각 없이 상대를 끌고 온 유진도, 별말 않고 상대를 뒤따라간 혜준도 막상 도착하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 왜 동네로 온 걸까? 유진이 혜준에게 애원할 때 ‘당장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했잖아. 그럼 그 원인이랑 멀고 먼 곳으로 가는 게 인간의 심리인데 유진은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동네 한가운데 서게 된 거야. 새벽 시간 적막한 가운데 가로등 불, 24시 편의점의 간판만 몇 개 반짝이는 브루클린의 슬럼 거리를.

 유진은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보다 -어려웠거든- 좀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다였고 혜준은 가타부타 따지기보다 장소를 찾고 있었어. 말했듯이, 오늘 중으로 보낼 게 있었으니까. 스트리트의 끝자락과 블록의 사이사이를 몇 번 꼼꼼하게 두리번거리더니 불빛도 잘 스미지 않는 골목을 발견한 혜준은 유진이더러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일렀지. 따라 하듯 시선을 요리조리 옮기던 유진은 방향을 재차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혜준의 코트 뒷자락을 붙들었어.

 “안 돼요, 거기.”

 “왜.”

 “딱 봐도 소굴처럼 보이잖아요. 마약 하는 놈들 있을 수도 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잡은 힘을 더 주는 유진을 보다 혜준은 차분하게 손을 들었어. 맨 처음에 유진이 달려들었을 때처럼 검지로 허공에 휙휙 그리니 유진의 손에 금방 힘이 빠졌고 발 부분도 갑자기 묵직해지는 걸 느꼈지. 유진은 당황하는 듯하다가 정말 이러기 있느냐는 행동을 취하며 제 머리칼을 헤집었어. 보고 있자니 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런 걱정을 해주는 게, 혹 젊은 인간 여성체로 내려와 그러는 건가 싶은 혜준이야.

 유진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무시하곤 얼른 그 골목으로 들어갔어. 주머니에서 작고 특수한 종이를 꺼냈고, 허공에 띄워 손가락으로 차분히 글을 쓴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붙도록 만들었지. 말 그대로 자신과 일하는 직속 신에게, 올림.

 그리고…. 혜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어. 고약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거든. 일반적인 궐련의 냄새는 아니었고, 확실히 대마초나 해시시를 태울 때 나는 메스꺼운 냄새였지. 서너 명 정도가 낄낄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비속어를 막 섞어가며 대화 중이야. 유진의 말이 맞았어. 하긴 자신이 사는 동네니까 생태계를 모를 리가 없나. 혜준은 유진이 이쪽으로 지나갈 일 없겠지만 만약 가게 되거든, 지금의 자신처럼 은신을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골목을 빠져나왔어.

 “괜찮아요?”

 “괜찮아.”

 동그란 머리가 보이자마자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상체를 기웃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유진이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말을 던졌고 혜준은 유진의 상태를 해제하면서 건조하게 대답했어. 어둑한 골목 방향을 살펴도 따라 나오는 사람도 없고 제 앞에 선 존재도 멀끔한 걸 보곤 유진은 그제사 가슴을 쓸어내리듯 길고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지.

 혜준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어. 이제 30일에서 31일이고 동이 트기까지 약 다섯 시간 정도가 남았어. 그런데 혜준의 손목이 잡히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휙- 딸려가듯 몸이 기울었어. 유진이 혜준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거든.

 “미안해요. 근데 아무래도 저 골목이랑 최대한 떨어져야 할 것 같아요. 마약 하는 놈들 이 시간대면 거래하느라 모인다고요. 분명히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지날 거예요. 지쳤는데 나사 빠진 놈들까지 상대할 기운은 없어서요.”

 결국 블록을 넘어서 길가 바깥으로 빠져나온 둘이었어. 유진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 뒤에야 혜준의 손목을 놔주었고, 혜준은 재차 내가 어떤 존재인지 혹시 잊었느냐 물으려 했지만 그만두었어. 의도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바로 사과하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저 말을 건네면 꼭 과시하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였어.

 다시 브루클린 거리. 사람도 없고 정적이야. 유진은 슬랙스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문득 집히는 플립폰을 꺼내 열어 보았지. 배터리는 47% 남았고 부재중 전화는 없음. 문자조차 오지 않았어. 유진은 뚱한 얼굴을 했지. 엄마는 아직 자신의 화든 울분이든 뭐든 덜 삭였다는 말이 될 거야. 아니면 곧장 항생제나 진통제 등을 먹고 깜빡 잠들었을 수도 있어.

 반쯤 가출한 저에게 전화를 안 해서 서운하다? 아니. 그냥 엄마 상태를 익숙하게 가늠하는 것뿐.

 “우리 목적지가 있기는 해?”

 “…… 아마 세탁소 가는 중일걸요.”

 같이 있어 달라기에 있어 주고는 있는데, 좋은 말로 하면 산책이고 나쁜 말로 하면 정처 없이 걷는 중이라 혜준이 물어본 거였어. 유진은 알고 있었어. 집이 싫은데도 동네로 기어코 넘어온 걸 보면 저가 엄마를 걱정하는 중이고, 집에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근방을 배회하고 가장 익숙한 곳에 들러보는 게 제 마음을 달랠 길이라는 걸 알았지.

 유진은 걷다가 고개를 내려 사이드 워크 블록을 봤어. 회색 블록들 사이로 초록색이 중간중간 무늬를 내느라 끼어 있었는데 그것만 밟으며 걷기 시작했지. 혜준은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었지만 왠지 물어볼 엄두는 안 나서 잠자코 살짝 간격을 벌려 뒤를 따랐어. 키도 있고 다리도 긴 게 폴짝거리듯 블록을 넘겨 밟으니까 우스꽝스러워 보여. 그러다가도 가만 보면 몸짓이 무용수 같기도 해. 덕분에 지켜보는 혜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금 웃어버렸고 유진은 걸으면서 집중하느라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지.

 “그림 리퍼.”

 “… 응.”

 “아까 제가 궁금한 거 물었을 때 대답 다 해주셨으니까, 저도 상응하는 이야기 들려드릴까요? 어차피 걷기만 하면 심심할 테고, 나름 정한 목적지까지 아직 더 걸어야 하거든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꼭 땅따먹기하듯 운동화 발끝으로 콩 콩콩- 세 번 뛰어 걸었어. 혜준은 긍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고 유진은 그걸 잠정적 허락으로 받아들였지. 왜 말을 하고 싶었느냐고 물으면, 그렇잖아. 전혀 일면식 없고, 오래 볼 사이도 아니기에 뻗어 나오는 자신감이나 안정감 비슷한 거. -사신 앞에서 안정감이라니, 조금 모순이긴 해- 어디 가서 해본 적 없는 이야기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말하기 싫었으니까. 안 그래도 잃을 게 많은데. 약점 될 게 뻔하잖아. 뒤에 있는 존재는 과거를 이용할 것 같진 않아. 사신의 미래에 고작 인간의 과거가 영향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유진은 음, 하고 끄는 소리를 냈어.

 저 공부 잘해요. 졸업만 하면 아이비리그로 곧장 갈 수 있다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매년 전액 장학금 타거든요. 아마 졸업할 때 학생 대표로 연설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알겠지만, 이 뉴욕시에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 인구가 적은 황인이에요. 기회의 땅에서 인종 이야기를 하면 기득권이나 주류들은 불편해하는데 나랑은 밀접해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립 고등학교에서도 비율 적은 황인이거든요? 이거 자랑이에요. 전 제 인종이 부끄럽지 않아요.

 저는 명백히 미국인인데 우리 엄마는 미국 사람이 아니에요. 한국. 당신이 관리하는 동양 쪽에 있는 거로 아는데. 쬐끄만 나라.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스무 살까지 살았대요. 우리 엄마 노래 잘하는 거 알아요? 진-짜 잘해요. 한국에 살 때도 노래 덕분에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고 했어요. 드문 거래요. 엄마의 나라는 무척 보수적이어서 여성이 배우는 걸 엄청나게 꺼린다고 했거든요. 웃기죠. 참, 우리 엄마 피아노도 잘 치고. 월광이랑 베토벤 비창 3악장을 특히 잘 쳐요. 들어보면 찬양하는 게 과언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혜준은 알고 있다고 하려다가 말았는데 종족과 직업 특성상, 이렇게 직접 드러낼 적에는 사전 조사 혹은 상대의 기억과 감정을 꿰뚫고 오니까- 우리 엄마가 성악과 피아노를 계속했다면 분명 성공했을 거예요. 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서도요.

 근데 돈이 없었던 거죠. 돈…. 어느 나라로 가든 똑같나 봐요. 그 푸른 종이 없으면, 큰일 나는 거.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 그걸 더 하려면 지지해 줄 배경이 필요했대요. 때문에 만나던 연인, 제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으로 왔고요. 그런데 웬걸. 알고 보니 이 작자가 난봉꾼에 도박꾼에 술꾼이었네? 아버지 쪽 집안, 그러니까 친가는 일찍이 이민을 와 자수성가한 경우라 부유하고 영향력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엄마랑 결혼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이런저런 수습하기 까다로운 사고를 아버지가 여럿 치고 다닌 이후로부터는 완전히 나와 엄마를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분리했어요. 책임지기 싫다고 없는 사람 취급한 거죠. 아버지조차 우리를 내버려 둔 채 자기 쾌락 좇기에 급급했고요.

 우리는 돌아갈 수 없었어요. 이 넓고 차가운 도시에서 죽고 싶지도 않았어요. 적어도 굶어서 비참하게는…. 그렇게는 안 죽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본디 유학비를 다 털어서 세탁소를 차렸어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요. 근데, 이 나라는 기회의 땅이고 이민자의 땅이라면서 혐오와 차별이 빌어먹을…, 끊이질 않아서 우리 엄마는 아주 사소한 문제거나 터무니없는 이유로도 부당한 취급을 받고…, 얻어맞았어요. 여성이고 가난한 동양인이라서. 오늘도……. Fuck. 우리 엄마가 맞을 이유 따위 없는 건데. 함부로 취급당할 사람 아닌데. 자꾸 이 나라에서는 우리를 함부로 취급해요.

 그래서 저는 성공하고 싶거든요? 돈을 많이, 아주 많이, 누가 봐도 놀랄 만큼, 무시 못 할 만큼 벌고 싶어요.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걸로는 안 되겠어요. 강해져서, 아무도 못 건드릴 만큼 강해져서 이 수모 다 갚을 거예요. 큰 소리를 내고 싶어요. …… 그러니까 그림 리퍼. 나는 아직 못 죽어요. 그럴 수 없어요.

 혜준은 유진의 끄트머리 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아무래도 감정이 북받친 모양이야.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해놓고 결국에는 원점, 자신을 뒤따라서 저승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로 끝이 났어.

 듣기에 앞뒤를 꾸며냈거나 개연성이 없지는 않아. 어쩌면 다시 한번 더 강조한 매끄러운 항소였고 완곡한 반기였지. 혜준은 깨나 오래 말이 없다가 덧붙이듯 대답했어. 생과 사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맨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전갈을 보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위로부터 답장이 온다면 더 확연해지겠지. 그 말에 유진은 잠시간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너털웃음을 지었어. 싸우자고 말을 꺼낸 게 아닌 데다가 혜준하고는 싸우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 그래도, 밝네.”

 “저요? 아. 원래 밝은 성격 아니에요. 나까지 죽상이면 엄마가 힘드니까 성격을 바꾼 거예요.”

 인간과의 교류가 없다시피 한 자기가 나름 건넨 위로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유진을 보면서 혜준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어.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도, 자기가 바라던 강한 모습 일부분이라서 그러는 것 같았거든. 진짜인지 그러는 체하느라 자기를 세뇌하는 건지. 어깨나 한번 으쓱하고 말았지.

 그러던 중 유진이 걸음을 멈췄어. 혜준은 반사적으로 건물의 간판부터 살폈지. 세탁소였어. 안쪽 불이 다 꺼진 영업 종료 상태의 세탁소. 설명하지 않아도 여기는 유진의 이야기 속 그곳, 간신히 부여잡은 희망이자 생계 수단이겠지? 유진은 건물을 한 바퀴 돌았어. 혹시나 건물에 수상한 흔적이나 사람이 있나, 하고 나름 주인으로서 관리하는 거였지. 이윽고 별문제가 없자 유진은 가방에서 천으로 된 필통을 꺼냈어. 그 안에서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순한 열쇠고리가 딸려 나왔어.

 “우리 집의 유일무이한 재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

 유진은 최소한의 불만 밝혔어. 벽에 달린 작은 백열등만 하나 켜 두고서 혜준을 돌아보았지. 혜준은 조금 얼떨떨한 듯 서 있었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공간에 이유 -죽음을 알리는 것- 없이 들어와 본 적이 없거든. 천장에는 비닐로 씌워진 각양각색의 옷이 일렬로 주욱 늘어져 있었고, 공간의 가장자리와 가깝게 설치된 평행봉 옷걸이에는 아직 손질 전의 옷들이 걸려 있었지. 한쪽 벽에는 다림질할 수 있는 커다란 판 두 개가 이어 붙어 있었어. 또 다른 벽면에는 옷감의 종류와 두께에 따른 재봉틀이 종류별로 놓였지. 안쪽에는 커다란 공업용 드럼세탁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단히 손을 씻거나 손빨래를 할 수 있는 공간과 각종 세제를 보관하는 곳도 있었어.

 “묵은 냄새 엄청나죠?”

 Ta-da! 중간에 있는 일반 세탁기 위에 훌쩍 올라가 앉은 유진이 마치 쇼에서 공간을 소개하듯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끔 팔을 살짝 벌리고 들어 보였어. 혜준은 다림질하는 공간 앞에 가서 물끄러미 보는데 판 뒷부분과 호스로 연결된 다리미가 한 켠에 놓인 게 눈에 띄어. 호스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듯했고 중간에 스프링을 연결해 놔 탄성이 있게끔 만들어 둔 상태였어. 혜준은 무의식적으로 다리미를 집어 들었는데 유진이 뒤에서 이야기했어.

 “그거 보일러 켜야 해요. 스팀다리미거든요.”

 “…… 아.”

 “평소엔 뜨거워서 엄마가 못 만지게 해요. 지금도요. 열여덟 살인데 제가 아직도 데일 것 같은가 봐요.”

 “데인 적 있었어?”

 물음에 유진은 증거물을 찾듯이 제 팔을 이리저리 살폈지. 1도 화상에 그쳤던 자리라서 다시 살펴보니까 흔적도 없어. 정확히 어느 팔을 다쳤더라? 만일 눈앞에 엄마가 있고, 물어봤으면 바로 답해줬겠지만.

 화상 자국을 찾다 보니까…, 기억이든 추억이든 원래 이렇게 한 번 물꼬를 트면 자꾸 쏟아져 나오고 그러는 건가? 학교에서도 이만큼 개인사와 개인감정을 말하고 싶어 했던 적이 없거든. 혼자 겸연쩍어서 습관으로 엄지를 빼 눈썹을 긁던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어.

 “어릴 때요. 심하게는 아니고 팔 쪽에 옅게.”

 일곱 살 때쯤. 웬일인지 그날은 일거리가 많았던 거로 기억해. 유진의 엄마는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상 위에 옷이 여러 개 올라가 있었는데도 자리가 모자라 뒤쪽 다림질을 하는 판 위에까지 옷가지가 쌓여 있었거든. 유진의 모친은 그런 경향이 있었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해서 받는 것 말이야. 세탁소는 건당으로 굴러가는 곳이니까 더 그랬는지도 몰라. 그 작은 등은 바빴어.

 엄마는 계속 자르고, 꿰매고, 다림질했어. 유진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빙그르르 돌며 바깥을 보다가 등짝을 보다가 한숨을 폭 쉬었지. 집에 가 있어. 엄마의 말에, 괜찮아. 하고 짧게 대답한 유진은 시선이 다리미로 꽂혔어. 맨날 엄마가 퍼포먼스를 하듯 들고서 현란하게 작업하는 다리미. 어디를 누르면 스팀이 나오는 신기한 물건. 눈치를 보던 유진은 슬그머니 다리미가 있는 쪽으로 갔지.

 잠깐 들어서 다리미 판에 두엇 번 문지르고 스팀 한 번 뿜기. 그게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 같았어. 판에 소리도 없이 도착한 유진은 발판에 올라서서 손잡이를 붙잡았는데, 약간 뜨거웠어.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서 몰랐던 거야. 몇 번 쥐락펴락하다가 그래도 기왕 들어보려고 했으니까 조심스레 쥐어 올렸어. 성공. 곧장 판 위에다 왔다 갔다 해 봤지. 이제 스팀만 뿜어보면 되는데, 유진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팔을 잘못 움직인 유진은 갑자기 다가오는 뜨겁고 따가운 기운에 깜짝 놀라 터트리듯 울었어.

 Rrrrr-!

 유진은 어깨를 들썩일 만큼 놀라서 Shit! 하며 크고 짧게 내뱉었고 혜준도 긴장한 듯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어. -사신도 놀랄 수 있지- 갑작스럽게 세탁소 안에 놓인 전화가 울려서 온 공간을 진동시키고 있었거든.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알고 전화를 거는 걸까?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당장 전화를 받아서 하마터면 간 떨어져서 저승 가는 줄 알았다고 일갈할 뻔한 유진이야.

 전화는 끝까지 울렸어. 처음에는 잘못 걸린 전화인 줄 알았는데, 이쯤 되면 누가 목적을 가지고 전화를 거는 것 같아. 수화기를 들었다가 재빨리 놓아 버릴까 생각하던 유진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어. 그렇지만, 알지? 밤부터 새벽에는 작은 소음도 엄청나게 크게 들리는 거. 게다가 왜인지 엄마한테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걸 들킨 기분이었어. 집이랑 세탁소랑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엄마가 이 근방에서 여길 보고 전화하는 것 같단 터무니 없는 생각. 참다못한 유진은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 밑으로 쪼그려 들어가 코드를 뽑아 버렸어.

 안부가 궁금하다면, 내게 플립폰이 있다는 걸 잊은 걸까. 꼭 방금 전화가 엄마였다고 기정사실 하듯 유진은 뽑힌 코드를 조금 원망하는 얼굴로 바라보았지.

 그러던 동시에 혜준에게서 신호가 왔어. 아까 전 보냈던 전갈의 답신 말이야. 곧장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쪽지 하나가 가지런히 접혀서 들어 있었어. 바로 장소를 옮겨 꺼내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는데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였어. 답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거든.

 사신, 차사가 저뿐인 것도 아니거니와 이번 경우의 유형은 드물기에 과정이 당연히 복잡할 테니 아무리 빨라도 1일로 넘어가는 즈음에나 올 걸 계산했다고. 어떻게 이번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과 의심을 떨칠 수가 없지?

 혜준은 유진의 등에 대고 이야기했어. 나갔다 온다고. 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이미 자리는 비어 있었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유진은 한참 간 혜준의 자리에 시선을 두다가 플립폰을 열어 사진첩을 살폈어. 며칠 전에 엄마랑 디지털카메라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찍었던 걸 다운로드 받아서 넣어놨을 거야. 별안간 그게 보고 싶었어.

 세탁소 건물의 스산한 옥상. 높은 곳에 오를수록 고요함은 배가 돼. 구름이 달마저 가려서 시커먼 하늘과 바람결을 잠시 응시하던 혜준은 쪽지를 펼쳐 차근차근 읽었지. 인간들처럼 가타부타 인사치레 없이 가장 큰 지시사항이자 의문 사항에 대한 답변부터 적혀 있었어. 상소를 올린 망자 Eugene Han, 한유진에 대한 집행은…, 변동 없이 진행된다. 라고.

 변동 없이 진행된다. 죽지도, 아프지도, 사고를 당하지도 않은 사람의 영혼을 가져오라는 말이 똑똑히 쓰여 있었어. 물론 혜준이 소상하게 적어 올렸기 때문에 단출하게 명령만 적혀 있는 건 아니었고 왜 집행해야 하는지, 이런 유형의 영혼과 망자는 정말 흔하지 않다는 점과 그런데도 차사라면, 사신이라면 한 번쯤은 겪는 기이한 사고라는 격려 한 줄. 그렇게 쓰여서 되돌아왔어. 혜준은 종이를 계속 바라보다가 다시 원래 모양대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어.

 유진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려던 혜준은 문득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정리가 안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주머니에 넣었던 손은 빼내기보다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꽉 쥐고 있었지.

 참 이상해. 맨 처음 만남처럼 설명을 하고, 주변인에게 작별 인사와 물품을 정리할 유예기간을 준 뒤 그냥 영혼을 천도해 오면 끝나는 건데. 수천, 수만 번도 더 한 일인데 뭐가 어려워서 이러는 건지. 전달사항을 모두 읽은 머리는 자신이 물었던 것에 상세한 대답이 돌아왔으니 이해를 하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반기를 들었어. 반기를 드는 이유가 뭔지 차분하게 반추하려고 해도 끝없는 불편함만 밀려들어 와. 참 이상해. 영혼을 데려오고 소거하고 천도할 때 자신을 이해시키고 달래 본 일이 없으니까.

 쪽지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아.

 「상소를 올린 망자 Eugene Han, 한유진에 대한 집행은 변동 없이 진행된다. 인간계에서 어떠한 외부의 상해나 소실, 병상이 없었으므로 곧장 명계로 회수할 수는 없다. 허나, 유예기간을 차사이자 집행자의 입으로서 거래하고 받아내도록 하라. 그리하면 명분이 생긴다.

 여기까지는 앞서 혜준이 유진에게 넌지시 설명했던 게 적중하는 문단이었지. 다만,

 「집행의 이유는 간단하다. 그 아이는 아직 태어나면 안 될 삶이 어그러져 태어났다. 운을 거스른 탓에 불운을, 불행을 타고나게 되었다. 어그러진 삶이 억지로 죽음과 멀어져 연명하고 있음으로, 아이가 가는 길목마다 삿될 일이 즐비할 것이며 본인을 잡아먹다 못해 주변인도 무너뜨릴 것이다. 삶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길은 한 갈래다. 이미 태어났고 아직은 본인만 무너지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회수하면 명계와 현세 사이의 균형이 유지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유진은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한 번쯤은 차사가 겪는 기이한 사고. 이런 유형의 영혼과 망자는 흔하지 않다. 그렇겠지. 생을 만들고 삶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절대자가 실수했다면 그럴 수 있지. 부당하지 않아. 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게 되는 거야. 모든 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계획적이고 뜻이 있는 절대자의 실수. 사실 실수가 아닐지도 모르지. 자신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여러 갈래의 삶 중 하나였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반역이야. 세계의 흐름과 음양을 방해하는 선동일 뿐이지. 문장만으론 모순이 보이지만, 반대되는 개념이 부딪혀 혼란스럽지만, 실수라잖아. 체계는 절대자가 세웠으니 당연히 상대적이지 않지.

 혜준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지그시 감았어.

 자비와 관용과 사랑을 가르치는 신이 실수에 대한 반성은, 전혀 하지 않는가?

 아직 태어나면 안 될 삶, 이미 태어났으니 더 늦기 전에 회수하려는 것뿐. 태어나면 안 될 삶을 살아서 불행이 절로 따르는 것뿐. 때로는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혜준이 사는 세계에서 평이한 말투로 날아온 잔인한 대답.

 전지전능의 영역에도 실수가 있다니. 그걸 이토록 가볍게 말할 수 있다니. 심지어 그간 지켜오던 생은 함부로 소거할 수 없고, 사는 함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가장 초입의 법도까지 어기며 편리하게 아이의 목숨을 앗아오라고 한다니. 인간이 땅에 태어나고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그 무심함과 무책임함에 숱한 원망을 들었으면서도 그저 '나의 뜻'이라는 가볍고 안일한 대답 아래 여전히 한각된 인간의 생. 끝 간 데 없는 비정함이라니.

 이 죽음은 잘못되었어.

 

* * *

 “뭐 하고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혜준이 들어오자마자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밖을 건너다보면서 느릿하게 빙그르르 몸을 돌리고 있던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서 물었어. 혜준은 대답하기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를 봤지. 앞으로 동이 트기 3시간 정도가 남았어. 저에게는 하루도 찰나와 같은데, 이 아이도 마찬가지인가?

 대답이 없는 혜준에게 입술을 삐죽인 유진이 다시 의자에 앉아서 빙그르르 돌았어. 그러면서 약간 끄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 저랑 같이 있어 주시느라 고생이 많아요. 원래는 되게 바쁘신 분이죠? 그 말에 혜준이 고개를 돌렸어. 너는 알고 있을까? 지금 내 주머니 속에는 어마어마하게 잔인한 쪽지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을 무조건 알려야 한다는 걸.

 “아까 전화요.”

 “…….”

 “처음에는 우리 엄마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닌 것 같아요. 엄마는 지금 자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거든요. 오늘 일도 많았고…, 엄마가 원래 잠이 얕아요. 수면제 처방받는 게 있거든요. 오늘 좀 힘들어서 그걸 먹고 깜빡 잠이 들었을 가능성이….”

 “한유진. 할 말이 있다.”

 유진의 말을 끊고 혜준이 말을 이었어. 영어 이름이 아니라 한글 이름을 부른 이유는, 글쎄. 유진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의자에서 일어나기보다 그 상태로 목을 쭈욱 빼서 건너다보는 행동을 취했지. 혜준은 분명 유진 앞에 나타나기까지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던 표정을 갈무리한 상태야. 그러니까 맨 처음, 유진에게 내려와 사망 예고를 알려줄 때보다 훨씬 건조하고 단호한 얼굴. 유진도 그걸 깨닫고는 입가에 살짝 띄우고 있던 미소를 차츰 아래로 떨어트렸어. 워낙 감이 좋은 아이니까 단번에 닿아오는 게 있었지. 아. 죽는 이야기구나.

 하긴 저 존재는 사신이잖아. 편하게 말을 붙이고 개인적인 공간에 들여주었다고 한들 변할 수 없는 사실이잖아. 게다가 첫 만남이 유쾌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결론이 나지도 않았으니까. 애초에 간극이 엄청나게 넓은 사이지. 궁금해하던,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이렇게 갑자기 났구나. 유진은 알 수 있었어. 아까 혜준이 나갔다 온 건 그 일 때문이라고.

 “Eugene Han. 혹은 한유진.”

 “…… 듣고 있어요.”

 “…… 너의, 사망일과 시간이 결정되었다. 사망일은 지금으로부터 3일 뒤인 2004년 11월 3일 오전 3시이며, 당일 내가 마중을 나와 네 영혼을 베어간다. 인지했는가?”

 “…….”

 “너는 상해나 소실, 병상의 증세 없이 곧장 저승으로 귀화하는 영혼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3일간의 유예기간을 둔다. 그동안 네가 어떠한 일을 해도 죽음에는 영향이 없다. 심판 없이 연옥을 넘게 된다는 소리야. 너의 생과 삶은 다시 조정되어 현세로 내려올 것이며, 이전까지의 모든 기억은 소거된다. 인지했는가?”

 아주 처음에 뜸을 들인 걸 제외하면 혜준은 막힘없이 망자에게 안내를 전달하고 있었어. 혜준의 일과가, 인간 세계로 내려 온 이유가 마무리되는 순간이기도 해. 모든 전달을 마쳤으니 저 아이가 처음처럼 반항을 하든 말든 시간이 되면 영혼을 가져갈 거야. 저는 위로 돌아가면 돼. 그게 다야. 더 뭘 할 수는 없어. 그게 이치이자 순리니까.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진은 양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차츰 주먹 쥐기 시작하다가 종국에는 손등이 새빨갛게 익고, 손바닥이 새하얗게 바래지도록 힘을 주었지.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돼. 어느새 차오른 굵은 눈물방울은 볼을 타고, 턱 밑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 무력했거든. 초장의 반항할 기운마저 빼앗길 정도로 너무나 무력했거든.

 처음에는 여지가 있었으니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저도 알았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꽁무늬를 당당하게 좇았는지도 모르지. 뒤집힐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다시 돌아와 못을 박는다는 건 자기가 아무리 울고 빌어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거잖아. 그래. 끝난 거야.

 그런 유진의 울음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혜준은 돌아갈 채비를 하려 했어. 아니 그 전에, 어느 정도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어. 신들의 장난 같은 실수로 삶을 회수당하게 생긴 아이에게 사탕 하나 물려주는 자비는 보일 수 있는 거잖아. 혜준은 그래서 원하는 소원이 있다면 한 가지 들어주려고 했어. 아니 두 가지. 아니, 아니 세 가지라도.

 말도 못하고 우는 아이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기뻐할까? 그럴 일 없겠지. 게다가 소원을 빈다고 해도 이미 남겨지는 사람이 생기는 걸. 누군가의 삶에 메꿀 수 없는 공백이 생기는 걸. 이 아이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에게 생전 처음 겪는 죽음을 똑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을 번복하는 소원은 신의 뿌리가 아닌 이상 인간인 유진이 사용할 수 없지만,

 …… 없지만.

 “내 말 잘 들어.”

 숨죽여 우느라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는 유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혜준이 커다란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게 했어. 들여다본 얼굴은 이미 넋이 나가 눈시울이며 코끝이며 잔뜩 붉어졌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호령하듯 이름을 불러 눈에 힘을 주고는 이마가 맞닿을 만치 가까이 붙었어.

 “너의 죽음은 잘못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흐…,윽,”

 “신이 지어 놓은 필연이라는 건 때때로 잔인해. 앞뒤를 뭉개버리거든. 그리고 그걸 억지로 이해시키지. 신의 안일한 검토와 판단으로 네가 죽는 거야, 알겠어?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가든 이미 현세에 내놓았으면 그건 오롯이 인간의 몫인 거야. 아무리 신이어도 네 몫을 가져다 마음대로 대의를 논하며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이야. 그게 신과 인간과 세상 사이의 법도야.”

 “무슨, 무슨…말인지, 모,르겠어,요…. 대체,왜, 이러는,건데요…?”

 유진은 미간이 잔뜩 좁아져서 숨을 몰아쉬었어. 말이 똑바로 이어지지 않았지. 한바탕 뛴 것도 아닌데 숨이 차고 열이 나는 것 같았어. 목구멍이 너무 매캐했고 손바닥 가죽이 팽팽 당기는 듯 저렸고 귓가에 심장박동이 크게 울렸고 온몸에 감각이 빠져나가고 있었어. 혜준이 설명하는 걸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어. 혜준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제게 되새기며 무언가를 다짐하듯 굴었으니까.

 맞댄 시선을 내리깔며 낮은 한숨을 뱉던 혜준이 똑똑히 이야기했어.

 “죽음을 번복하는 소원을 인간은 빌 수 없어. 그렇지만 신의 뿌리인 나는 가능해. 그 무엇보다 순수한 영혼인 나 자체로 소원이 될 수 있으니까. 별이 죽듯 내 영혼을 바치면 된다.”

 “뭐라, 구요…?”

 “사적인 감정 따위 없으니 널 위해 소원을 빌 생각은 없어. 어디까지나 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바로잡는 거다. 이해하겠어?”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어. 누가 영문도 모르고 죽고 싶겠어. 누가 실수로 태어났다며 죽이는 걸 받아들이겠어. 지금 순간이 무효가 되면 나 자신이 살 수 있고, 그래야 엄마에게 모질게 꽂혔던 모든 부당하고 억울했던 것들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는 걸 알아. 근데 지금, 이 존재가 엄포를 놓는 건, 이미 영혼인 자신이 다시 죽겠다는 말이잖아? 그게 가당키나 해? 유진은 고개를 저었어. 싫어요.

 “허튼짓하지 말고.”

 “나 죽는다며…. 그럼 당신이 죽는 거잖아!”

 “아쉬우면 똑바로 살아서 내게 제사라도 올리던지. 그 개념이 네겐 어렵겠다마는.”

 혜준은 코웃음을 치듯 하다가, 아니 좀 후련해 보이는 태도로 가슴이 부풀 만큼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어. 다른 저승의 존재와는 다르게 본디 감정이라는 게 거세된 채로 지내는 영이자 신이지만 지금은 좀 웃고 싶어서. 그래서 웃었어. 그 차갑고 딱딱한 표정에서 조금은, 아마 마주 보고 선 유진이 아니라면 누구도 볼 수 없을 온화한 표정으로.

 “잘 살아.”

 혜준은 주머니 속 쪽지를 찢었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지. 두려움과 충격, 그리고 다시 찾아든 희망 때문에 정신이 거의 다 빠지고 몸에 힘을 도무지 가눌 수가 없었던 유진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혜준의 소멸이 진행되었어. 가장 밝은 빛이 세탁소의 작은 공간 가득히 유진을 감쌌지. 너무 눈이 부셔서 되레 질끈 감아야만 했어.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질끈 감은 눈두덩에서 느껴지던 빛이 다 사그라들었어. 그런데도 유진은 눈을 뜰 수 없었지. 그러다, 서서히 자신 얼굴을 덮치는 새 빛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느리게 떴어. 눈물로 얼룩진 속눈썹이 뒤엉켜 눈앞이 부옇게 흐렸지만 확실한 건, 동이 트고 있었어.

 

* * *

 미음 모양의 방을 각각 기역과 니은으로 나눠 거꾸로 뒤집고 니은 쪽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된 건물 복도와 구조가 훤히 보이는 방. 중간마다 고가의 예술품이 비치된 공간에 유리의 위쪽마다 블라인드가 달려 있고 안으로는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클래식 소파와 상석의 카우치. 바로 뒤 길게 난 사무용의 심플한 메탈릭 테이블과 장식품 하나와 데스크탑 하나. 뒤로는 한강이 바로 보이는 구조. 맞은편 벽걸이 대형 TV에 떠 있는 로고. 바하마.

 유진은 상석의 카우치에 기대듯 눌러앉아 다리를 꼰 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어. 공연히 왼손을 들어 이미 깔끔한 손톱을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리고 튕기는 중이었지. 제 앞에 잔소리꾼 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따지고 있었거든.

 “이지스 레이더 장착 기술을 중국에 넘긴다고 하면, 미국 해군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유엔 법으로 치고 들어올 거라고.”

 “행정부에 친구들 많이 있잖아? 상원에도 있고.”

 “한국에서 벌써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아. 정말.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전부 소용없다는 태도로 굴면 나도 곤란하다니까. 그걸 알 턱이 없는 상대의 몸짓은 커져만 가고 유진은 그만 이야기하자는, 넌더리가 난 표정을 띄웠어.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마, 그냥 나한테 맡겨. 이렇게 일갈하면 또 묻겠지. 그래서 유진은 그냥 배웅해주기로 했어. 안 그래도 오늘 중요한 손님 맞는 날인데 컨디션이 저조할 수는 없지.

 바하마. 단순하게 설명한다면 투자회사이자 펀드 회사야. 다만 부도 직전의 기업을 상대로 주가 조작, 비율 조작을 해서 손아귀에 넣은 뒤 단기간에 비싼 값으로 불려 팔아넘기는 짓도 병행하는 벌처 펀드라는 사실? 어떤 국가든 정부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규모 2조 원 이상의 기업이 있다면 지사와 계열사를 설립하는 바람에 전 세계 50개국 이상의 입지가 있는 회사라는 사실.

 유진은 그 회사에 입사할 적부터 루키였어. 이전 회사인 JP모건에서 파생상품 하나를 거하게 팔아 단숨에 위상을 올렸거든. 워낙 백인이 주류인 업계고 종목인데도 상위권을 꿰차게 된 거야. 바하마는 뉴욕 월스트리트가 본사고 그곳에서 한 번도 동양인이 지사/부 지사장이 된 적 없는데 유진은 부 지사장을 달고 있다가 한국으로 넘어와 지사장을 달았거든. 간단하게 말해서 돈으로 따져 크게 성공한 거야.

 물론 기억하고 있어. ‘허튼짓하지 말고. 잘 살아.’라던 충고를. 그렇지만 유진도 분명히 말했었지. 아무도 못 건드릴 만큼 강해져서 수모를 갚겠노라고. 지금 저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 그 잘난체하는 백인들 사이에서도 꿇리지 않을 만큼. 그리고 이렇게 성공해야 본인이 스치듯 말했던 그 제사라는 걸 성대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아마 그 사신은 모를 거야.

 오늘은 미팅이 있었어. 작업을 쳐야 할 기업이 있어서 거래했던 정부 쪽 사람을 초대했거든. 혼자 오는 게 아니라 말단 사원을 데려온다고 해서 좀 의아한 유진이었어. 이런 큰일을 하는데 경험도 없는 병아리가 와서 설명을 듣는다? 얼마큼 영민하기에 그러는 거지? 싶었지. 원래라면 대동하는 건 거절하고 정부 쪽 사람만 데려다가 이것저것 대조하고 작전을 짠 뒤 일을 처리할 –사실상 방패막이 수단인- 말단 사원에게 끝난 내용만 전달하면 되거든. 호기심이 동해서 괜히 불러 확인하고 싶었어.

 시간이 다 돼서 유진은 자신한테 계속 따지고 있던 불청객, 섀넌 루치오를 배웅하러 복도로 나왔지. 그 와중에도 위험한 계획이라고 섀넌이 일갈하자 귀를 막고 싶은 걸 웃어가며 버티는 중이야.

 수트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잠시간 숙였던 고개를 들자, 정부 쪽 사람이랑 그 뒤를 따르는 말단 사원의 모습이 보였어. 그리고……. 유진은 시선이 멈출 수밖에 없었지.

 정부 쪽 사람이 반가워하며 악수를 내밀었고 일단 잡아서 인사치레나 했어. 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뒤쪽으로 쏠렸지. 표정이 없어. 머리는 짧았지만 들뜨는 데 없이 단정하고 차분했는데 내려다보니 새삼 동글동글해 보였고, 옷은 손과 목덜미의 반절 정도만 겨우 드러날 정도로 갑갑하게 다 껴입고 있었지. 섀넌도 키가 크고, 저도 키가 크고, 정부 쪽 사람도 키가 큰데 혼자서 엄청 쬐끄매.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체격이 왜소했어. 아니, 똑같은 체격인 게 조금 어이가 없어. 나잇대가 비슷해 보였는데 왜 자라지 않았지? 여기가 아무리 벽과 천장에 LED 등을 박았다지만 상대의 피부는 너무 희어. 하얗다 못해 창백해. 그때처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부 쪽 사람이 말단 사원에게 자신을 가리키며 소개했어. 바하마 코리아의 지사장, 유진 한이라고. 말단 사원은 자신을 조금 얼떨떨하고 의아하게, 그러나 분명하고 날카롭게 눈을 마주 대더니 악수가 아니라 팔을 옆구리에 모으고 머리를 숙이는 한국식 인사를 했어.

 “이혜준입니다.”

 겉모습도, 목소리도 똑같아. 분위기도 똑같아. 그때와 틀림없어. 다른 게 있다면 인간이라는 점과 눈빛 아닐까. 그저 공허하던 검은 눈이 지금은 뭔가 깊고 총명해 보였거든. 그래도 눈의 모양은 똑같아. 점이 있는 것도 똑같아. 여전해, 정말.

 아. 생각하니까, 이제야 이름을 들었어. 너무 오랜 뒤에야 알게 됐는데 무슨 상관이야? 알게 된 게 중요하지. 유진은 손을 가지런히 붙이고 머리를 숙이는 한국식 인사를 따라 했고 정부 쪽 사람과 섀넌의 표정에 물음표가 떴지. 입때껏 유진이 상대에게 맞추는 인사를 한 적이 없어서 그래. 지금 유진 자신에게는 말단 사원, 아니 이혜준만 보였으니까.

입술만 달싹거리던 유진이 멋쩍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어.

 “조금 외람된 말인데요.”

 “……?”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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