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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written by. 라치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뚜-뚜- Y대학교 유선 합격자 조회입니다. 수험번호 여섯자리를 입력하세요.…

 …2,3,6,8,0,1.

 

 그 무엇보다 밝고 명랑한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봄이 귓가에 울린다.

 지저귀는 샛소리와 흐르는 냇가소리에 버금가는 바이올린 선율이 쿵쾅대는 심장소리와 함께 울려댄다.

 

 뚝 끊긴 음악 소리, 잠깐의 정적.

 … 수험번호 이, 삼, 륙, 팔, 영, 일. 이, 혜, 준.

 합격입니다. 축하합니다.

 

 스물 세 살. 늦은 나이에 도전한 대학입시에서 얻어낸 성과였다.

 혜준은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삼킨 눈물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늘 그래와서 그랬을 뿐.

 

 저녁 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은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는, 발걸음이 가벼워도 될 것 같다.

 

 “다녀왔습니다. 고모!”

 

 약간은 멍멍한 소리에, 안방을 흘깃보자 중간중간 끊기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엄마! 요즘 다들 한 학기씩은 휴학한다니까!”

 “너 이제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인데 무슨 휴학이야!”

 “나 과외도 하고, 좀!”

 “마리야, 아빠가 다 해결할거야. 등록금 낼 때까지 마련해볼테니까-”

 

 사촌 마리를 둘러싸고 애걸복걸하고 있던 고모 내외는 혜준을 보고 눈물을 찍어낸다.

 

 “어, 혜준이 왔니?어서 씻어라.”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아무 것도. 엄마 아빠 알겠죠? 나 그렇게 한다니-”

 “혜준이 너, 잠깐 앉아봐라. 고모부가-”

 “아빠!! 혜준이 돈 건드릴 생각 추호도 하지 마.”

 

 일말의 양심인지, 염치인지 분에 겨운 발걸음으로 마리는 고작 안방에서 열걸음 떨어진 제 방으로 들어간다.

 

 “무슨 일인데요. 고모부.”

 “얘 혜준아, 마리가 글쎄.. 휴학을..”

 

 훌쩍이는 콧물만큼이나 듣기 싫은 소리였다.

 요는 마리의 대학 등록금을 홀랑 날려버린 고모부와 등록금 벌 때까지 휴학하겠다는 마리.

 그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제 딸이 제 때 졸업하지 못할까, 기자라는 꿈을 이루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고모.

 늘 이 집안의 문제는 돈에 대한 집착이었다. 거품 낀 집착.

 

 혜준은 앉지도 못한 채 문지방 근처에 겨우 서서, 고모부의 비굴하면서도 비열한 눈빛을 마주해야했다.

 

 “혜준아, 그래서 말인데……”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혜준은 작은 변호사 사무실에 경리로 취직을 했다.

 다행히 돈도 적당히 벌고, 어려운 사람들도 적당히 도와주는 동네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한 달에 7만 원을 월급으로 타서 반은 월급 통장에, 그 나머지 반은 고모네 생활비로 주고 나면 만 원 겨우 남짓한 돈으로 한 달을 보내야했다. 그것도 집이 달동네라 오며가며 타고 다니는 마을버스비로만 쓰고 아끼고 아껴 시집 한 권을 사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렇게 모은 50만 원 돈이 통장에 고여있었다.

 언젠가 대학에 가게되면 1년은 걱정없이 다니고 싶어 마련한 씨앗이었다.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무기력해진다던가. 씨앗마저 뺏긴 혜준은 잠자리에서 시들어갔다.

 그렇게 춥지도 않은 겨울이었건만 혜준의 마음은 칼날에 베인 것처럼 쓰라렸다.

 

* *

 

 “변호사님, 저 잠깐 은행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 양. 알겠데이. 댕겨온나.”

 

 이왕 은행에 온 거, 가볍게 깨자. 가볍게. 산뜻하게.

 수도 없이 중얼거리며 혜준의 차례가 다가왔다.

 

 “금리 20퍼센트 짜리인데 해지하시려고요?이제 10퍼센트 대로 떨어질텐데요. 아껴두셨다가-”

 “아니요. 해지해주세요. 저, 그리고.. 새 돈으로 주실 수 있어요?”

 

 노란 봉투에 고이 담긴 빳빳한 오십만원을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꼭 끌어안고 은행에서 걸어나갔다. 담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는지 들어오던 한 청년과 부딪혀 약간 휘청거렸다.

 

 “어, 어 괜찮으세요?”

 

 휘청거린 건 난데, 왜 본인이 더 놀라는 거지?

“네, 고맙습니다.” 하고 나가려는데, 발에 딱딱한 책 한권이 치인다.

아래를 쳐다 본 혜준은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라고 적힌 작은 책을 주워 그에게 건넨다.

“아. 감사합니다.” 시집 한 권을 툭툭 터는 소리를 뒤로 하고 꾸벅한 채 혜준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마리야, 자?”

 “아니.”

 

 같은 방안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건만, 동그란 눈알 네 개가 여즉 말똥말똥했다. 누군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혜준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가방에서 봉투를 꺼낸다.

 

 “자. 받아.”

 

 누운 상태로 의아하다는 듯이, 그리고 약간은 불쾌한 듯이 쳐다 본 마리는 벌떡 일어난다.

 

 “야 이혜준!”

 “받아. 고모 우시더라.”

 

 담담하게 돌아눕는 혜준은 오른팔을 베고 누운 채 등을 굽혔다.

황당하다는 듯 혜준을 쳐다보는 마리는 봉투를 쥔 채 흐느끼며 “야... 이혜준... 흐끅.. 끕... 내가... 꼭... 갚는다...” 하며 한참을 흐느꼈다.

 혜준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울음을 참을 뿐이었다.

 소리내서 우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하니까.

 

* * *

 

 

 그로부터 한 달,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인 날이었다.

 12월 25일, 성탄절은 공휴일이었건만 주6일이 기본, 주7일 근무도 일쑤인 상고출신 경리는 월급 봉투를 받고 소중히 가방에 넣어둔다.

 그리고 시내 근처의 작은 책방에서 시집이라고 적힌 책장 앞에서, 딱 하나만 사야한다는 생각으로 골똘히 고민한다.

 

“어?맞죠. 그 때 은행에서!”

 

 조용한 책방에 울려퍼지는 은은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화사하게 웃는 젊은 남자가 서 있다.

 날라리처럼 청잠바에 옆으로 매는 큰 가방, 가방을 들고 있으면서도 왜 책은 손으로 쥐고 있는지.

 그 때 그 사람이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아.. 네. 안녕하세요.”

 “잘됐다.”

 

 엉뚱한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큰 가방을 뒤적거리며 손바닥만한 책을 제게 내민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이거요. 이거 주고 싶었어요.”

 “네?”

 

 당황한 제 물음에 그저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그는 추운 겨울에 한 줄기 햇살같은 해사한 사내였다.

 

 “아 잠깐만요.”

 

 내밀던 시집을 다시 펼치더니 가슴팍에 꽂아놓은 볼펜 하나를 턱에 대고 누른다.

 뭔가를 쓱쓱 쓰다가 잘 나오지 않는지 심지 끝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얘도 숨을 불어넣어줘야 잘 나오거든요.”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인가?그래도 퍽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요. 사양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또 봐요.”

 

 시집을 손에 쥐어 주더니 성큼성큼 걸어 서점 바깥으로 나갔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혜준은 큰 눈만 그저 끔벅이며 시집을 열어보았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라는 시가 실려 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 202 011501, 채이헌 - 」

 

 혜준은 이름께를 손끝으로 만져보며 되뇌었다. “채, 이헌-” 예쁜 이름이네.

 

* * *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늦겨울 추위가 매섭게 닥쳐왔다.

 

 “형! 맨날 그렇게 어딜가는거야? 막걸리나 한 잔 하러가자!”

 

 한 학년 후배들과 함께 방학 동안 다가올 시위를 위해 몰래 써클방에 모여 삐라를 찍어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약간은 매캐한 연기가 묻은 듯이 목 부분에 거뭇거뭇한 자욱이 남아있었다.

 

 “어 다음에. 다음에!” 하던 이헌은 허겁지겁 뛰어가 버스를 잡아탄다.

 신촌에서 종로로 향하는 버스였다.

 

 

 이헌이 버스에서 내릴 무렵 진눈깨비도, 함박눈도 아닌 것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또 눈이 오네.” 겨울마다 내리는 눈인데, 올해 겨울의 눈은 뭔가 특별했다.

 버스에서 내린 이헌은 성큼성큼 갈 곳이 정해져있다는 듯이 걸어가 성탄절 장식이 남아있는 책방 앞에 우뚝 섰다.

 책방에 책을 사러 온 것은 아니고 누군가를 찾듯이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 보는데,

 

 “누구 찾아요?”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본 이헌. 눈만큼 말간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동자, 그 사람이다.

 바보같이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턱 막힌 말문에 당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 찾아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이헌에게, “아님 말구요.” 하고 혜준이 뒤를 돌자 “아뇨, 잠깐만요. 저, 저..” 이름을 몰라 소리만 낼 뿐이었다.

 이헌을 마주보고 선 혜준은 의연하게 “이혜준이요.” 라고 말을 건넸다.

 

 “이혜준이라구요. 제 이름.”

 

 이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겨우 한 마디를 내뱉는다.

 

 “이혜준씨, 우리 차 한잔 해요.” 잠시 멈춘 세상이 다시 시작되기 위해서는 혜준의 목소리가 열쇠로 필요했다. 1초, 2초, 3초.

 

 “네. 그래요. 채이헌씨.”

 

* *

 

 

 무슨 용기였을까, 혜준의 처지에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와 호감으로 말을 섞는다는 건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혜준은 지난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가방 속에 같은 시집 한 권을 품고 다녔다. 언젠가 만나게 될 운명이란 희망을 가져보면서.

 

 유행하는 포크송이 잔잔히 들려오면서,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나는 찻잔만 손에 들고 홀짝이기만 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분명 일 분은 되지 않았는데.

 

 “삐삐, 기다렸는데. 사실, 하루 건너 한 번씩은 이 책방 와봤거든요. 친구들이 막걸리 먹재도 안가고-”

 “막걸리 좋아해요?”

 

 아차 – 뭐에 홀리면 이렇게 바보같은 걸까. 뭐 좋은 소리라고 얼치기 같으니라구.

 “아- 아뇨. 그냥, 그냥 먹는 거죠. 시절이 하수상하니까.”

 

 혜준은 별다른 대답 없이 블랙커피 한 입을 머금는다.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혜준씨는요? 뭐 좋아해요?”

 글쎄… 취향이란 걸 가져본 적이 있었나 내가.

 

 “음식? 색깔은요?, 아님 작가?”

 그래, 내가 취향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구나. 그랬구나.

 이제야 깨달은 듯 혜준은 살짝 웃으며 “잘 모르겠어요. 음... 안개꽃. 안개꽃 예쁜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예쁘다, 좋다도 아닌 예쁜 것 같다에 이헌의 마음이 왠지 찌르르하다.

 이내 혜준은 가방을 뒤적이며 누런 종이에 싸져 끈으로 묶인 책 한권을 내민다.

 

 “여기요. 그 쪽 주고 싶었어요. 신세지고 싶지 않거든요.”

 

 신세라, 글쎄 한 달 간 품고 다닌 시집이 부채감 때문인지 몰래 찾아온 연심 때문인지 분간할 재주가 없던 스물 네 살의 믿음이었다.

 

 “고마워요. 나 그 시집 정말 좋아하거든요. 잘 볼게요.”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도 저마다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 시간이 너무 늦었죠? 혜준씨 집이 어디에요? 데려다 드릴게요.”

 

 7시가 조금 넘은 손목시계를 보며, 저보다 더 호들갑인 그였다.

 왠지 이 사람에게는 집을 알려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성북동 산꼭대기요.”

 

 

 종로에서 성북동을 향하는 만원 버스에 나란히 서서, 서로에게 닿을까 괜시리 팔에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눈 오는 길에 버스가 천천히- 천천히- 굴러갔다. 마음은 빠르게 물들어 가는데.

 혜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이헌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버스 기둥에 붙어있었다.

 절대 닿으면 안돼! 라며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성북동 못 올라갑니다! 자- 내리세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종종 버스 종점에서 두 세정거장은 멀리 내려 달동네까지 걸어올라가야하는 가파른 길이었다.

 그 새 눈은 얼어붙어 미끌미끌한 빙판이 되어 있어 혜준은 살금살금 걸음을 내딛었다.

 

 “저, 채이헌씨. 전 여기서 더 올라가야 해요. 이만 가보세요.”

 “그런게 어딨어요. 저도 이 근처 살아요.” 하더니 씩씩하게 앞서 나간다. “이 쪽 맞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혜준은 동시에 내딛은 걸음이 살짝 미끄러지자 아! 하고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잽싸게 뒤돌아 본 이헌은 팔을 뻗어 혜준의 허리를 붙잡아 감싼다.

 

 “어- 어!… 괜찮아요?”

 

 사실 잡아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괜시리 안겨있는 제 모습이 수줍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좋다’는 감정이었다.

 이헌은 감싸안은 팔을 풀어주며, 제 왼손을 내밀었다.

 

 “자- 잡아요.”

 

 왜였을까. 혜준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이헌의 손을 잡았다. 마치 이어진 인연의 실타래처럼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이 꼭 매듭과 같아보였다.

 

 

* *

 마리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가로등. 이헌은 발을 콩콩 내찧으며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요. 잘자요. 혜준씨”하고 큰 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그 때부터였다. 이헌은 매일 아침 혜준을 종로까지 데려다주고, 신촌에 있는 제 학교로 향했다.

 

 

 졸업을 앞둔 2월, 이헌은 자대 대학원에 입학을 걸어두고 연신 자보를 만드는 데 여념이었다.

 혜준을 생각하고, 혜준을 만나고, 혜준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이유로 날마다 달동네가 철거되고 있었다.

 운 좋게 교수 아버지와 장관 딸 어머니를 만나, 비싼 등록금을 척척 내며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제 처지가 가소로웠다.

 혜준은 제 부채감을 희망으로 바꾸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겨울에 파는 군고구마를 청잠바 안에 품은 이헌이 동네 변호사 사무실 앞에 기다리고 있으면, 창문에서 혜준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곧 퇴근해 계단을 내려온 혜준의 걸음이 빨라지자, 지켜보던 이헌은 “뛰지마요! 다쳐요!” 하며 제가 뛰어갔다.

 

 혜준과 이헌의 걸음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내딛고 있었다.

 “춥지 않았어요? 천천히 오지 그랬어요.”

 

 이헌은 웃으며 혜준의 손을 호호 불어준다. 그리고 그 손을 제 심장 위로 얹으며 “따뜻하죠? 이럴 땐 좋다고 하면 돼요, 이혜준.” 하고 농을 쳤다.

 

 성북동 근처 노포에 나란히 앉아 국수 두 그릇을 호호 불며 먹기도 하고,

 혜준이 출근하지 않는 날엔 피카디리에 영화도 보러 가고.

 가끔은 시위에 나간 이헌이 혜준을 데리러 오면, 이헌에게 나는 매캐한 냄새에 위험한 일 하지 말라며 싸우기도 했다.

 

 

* * *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집 앞에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던 초여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 밑에 서있는 이헌을 보고,

 그럼 그렇지 이혜준이라고 스스로 퉁을 주며 제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솔직한 사랑이었다.

 시원한 매실차를 한 잔 떠서, 이헌에게 내미는데 실실 웃으며 용서해달라는 표정이 얄미웠다.

 

 “나 다 용서한 거 아니에요! 여름날에 바깥에서… 나만 나쁜 사람 만들어 채이헌!”

 “시위나간 거 아니에요. 자보만 좀 쓴 거에요. 내가 글을 잘 쓰잖아요.”

 

 자기 마음도 모르고, 해맑게 제 자랑을 하며 안심시키려는 이헌이 얄미워 가슴팍을 두어대 내리쳤다.

 

 “아야! 아야!”

 “많이 아파요? 괜찮아요?” 하며 혜준이 걱정하는 얼굴을 가까이 하자, 뺨을 감싸 안고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다.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어때요. 내 애인인데. 아 참!”

 

 이헌은 들고 있는 종이 봉투를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데,

 혜준은 봉투를 받아들고 묵직함에 이게 무엇인지 빠르게 눈치채고, 차오르는 눈물에 고개를 떨군다. 그런데 예전처럼 눈물을 참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흐르는대로 뚝뚝 떨어뜨린다.

 

 “어? 좋아할 줄 알고 사온 건데. 울지 말아요, 응? 혜준아- 울지 말아요, 응?”

 종이봉투를 꽉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보내는 혜준을 이헌이 그대로 끌어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토닥토닥. 쉬이- 쉬이- 백색소음을 내다가,

 “내가 울렸으니 이혜준 책임져야겠네.”

 

 

* *

 

 

 마리 방에 들어가 앉은 혜준은 봉투에서 제법 큰 책 한 권을 꺼내본다.

 첫 장을 열어보면, 「사랑하는 惠俊에게, 너는 나의 반짝이는 희망이야. 사랑한다. 蔡理憲」

 밀려오는 울음이 그를 향한 저의 마음인지, 제게 가득 찬 그의 마음인지 알기 어렵다.

 혜준은 그대로 책을 내려놓고, 무릎을 끌어안고 소리내어 운다.

 「독학 - 대학예비고사 기출문제집」

 

 책 만이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혜준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 * * 

 

 

 “형! 이거 찍을까? 등사기 어디다 뒀지?”

 “어, 그거 조교실 책상 밑에.”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인 7월, 외신기자들이 속속들이 한국에 들어와 보도경쟁을 시작했다.

 미지의 동방, 두 쪽으로 갈라져 죽고 죽이며 가난에 허우덕대던 나라.

 서양인들의 눈에 서울은 누가 보기에도 근사한 근대 도시였다.

 깨끗한 길거리, 시원하게 뚫린 도로, 정리된 가로수와 꽃들.

 그 깔린 바닥엔 도시 빈민들의 삶이 놓여있었다.

 

 한국의 발전을 소개한다며, 외신기자들이 저마다 서울의 곳곳을 쑤시고 다녔다.

 그 중 대학가와 젊은이들이 밀집한 신촌은 보도하기 알맞은 장소였다.

 번쩍번쩍한 거리, 생기있는 대학생들. 누가 봐도 에너지 넘치는 올림픽의 기대를 한 몸에 보여줄 수 있었다.

 신촌권 대학들은 그 때를 노려 광장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이헌이 손으로 쓴 전단지와 자보가 학내 곳곳, 신촌 곳곳에 흩뿌려졌다.

 빈민들을 쓸어버리듯이 순진한 젊은이들을 잡아내는 것은 구렁이같은 어른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7월의 어느 날, 상민의 자취방에 숨어있던 이헌은 경찰에 연행된지 일주일만에 구속 수감되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검사하고 합의봤다. 군대를 가든지, 미국을 가든지 선택해라.”

 

 아크릴판에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이헌의 깨끗한 얼굴이 비춰왔다.

 저지른 운동이 많았기에, 징역을 피할 순 없었지만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청을 넣은 덕에 감옥에서도 곱게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헌은 깨끗한 제 얼굴이, 피떡이 된 친구들을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웠다.

 이헌은 혼자 있는 꽤 넓은 독방이, 빽빽하게 잘 공간만 겨우 가진 곳에 뒤엉켜있는 수감실을 지날 때마다 부끄러웠다.

 이 와중에도 혜준이 그리웠다. 날 걱정하고 있을텐데. 날 그리워하고 있을텐데.

  

 굳게 닫힌 입술을 뗀 이헌은 제 어머니에게, “어머니 혜준이는요?혜준이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한 번만요.” 그걸 들은 채 교수는 “아들 놈을 잘못 키웠어.”하며 면회실을 나가곤 했다.

 

 “미국 간다고 약속해라, 이헌아. 그럼 그 아가씨 데려 오마.”

 

 

* * *

 

 

 무더위가 가시고 선선해질 무렵, 혜준이 면회를 왔다.

 수척해진 얼굴에 설렘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저처럼 하얗고 예쁜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 왔다.

 

 “이헌씨, 안개꽃이에요. 안에 넣을 수 없다고 해서, 들고 왔어요.”

 혜준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다시 꽉꽉 틀어막기 시작했다.

 “말 좀 해봐요... 예쁘면 예쁘다, 아니면 아니다...”

 묶인 몸의 이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없었던 듯이 자신이 혜준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혜준아. 편지… 보내지마. 찾아오지도 말고, 그리워하지도 마. 이제 안녕이야.”

 

 어쩌면 혜준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헛된 기대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었던 것일까.

 쏟아지는 눈물을 틀어막은 혜준과 달리,

 틀어막아도 눈물이 쏟아져나오는 이헌이었다.

 

 “수감번호 0909!”

 

 밖에 있던 교도관이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곱게 싸인 안개꽃 한 다발을 제 방으로 던져주었다.

 안개꽃이 시들어가는 것처럼 이헌도 함께 파리하게 시들어갔다.

 

 

* * *

 

 

 6년 뒤,

 

 “이사무관! 오늘 성탄절인데 퇴근하고 뭐해?”

 “글쎄요…”

 “우리랑 같이 맥주나 한 잔해! 어? 눈 오네! 이런 걸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는건가?”

 “자자! 회의 준비합시다. 금융실명제 후속처리한다고 국회에서 난리났어요!”

 

 

 혜준은 어엿한 재정경제원의 3년차 사무관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모처럼 맞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 날처럼.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혜준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여느 날과 다름없는 귀가중이었다.

 진눈깨비도 함박눈도 아닌 것이 펑펑 오네.

 

 “어? 기사님 잠시만요! 내릴게요! 죄송합니다!”

 

 불빛 장식과 꽤 오래 된 트리, 달려있는 반짝이는 수술들.

 ○○책방.

 여기가 아직도 있네.

 

 “어서오세요, 아?몇 년 전에 자주왔던 경리 아가씨 아니야!”

 몇십 년 장사 내공이 허투루 쌓인 것은 아닌지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주인이었다.

 “아니 왜 그리 안왔어! 이사갔어 아가씨?”

 구구절절 얘기하기 번거로운 마음과 잊고 지냈던 아픈 상처가 떠올라 희미하게 웃고만 말았다.

 “그러게요.”

 

 자주가던 시집 코너에 가 책장을 골똘히 쳐다본다.

 이젠 원하는 책 정도는 너댓권씩 척척 사도 되련만, 그래도 한 권을 고르고 싶어 고민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한참을 보다 따뜻한 실내공기가 답답해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간단히 목례를 하고 출입구로 향한다.

 

 “자주 와요! 그 때 그 젊은 사람은 꼭 이 맘 때쯤 들리더만!”

 

 그래, 이헌은 올 수 있지. 아니야 나랑 헤어졌는데 어떻게 여길와?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리움, 원망, 아릿함…

 

 책방을 나가 문 앞에서 괜시리 하늘을 쳐다보았다.

 유난히도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이었다.

 크게 숨을 내쉬고, 그래 아직 이혜준 못 잊을 수도 있지. 괜찮아, 괜찮아. 다독거리며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내딛다 말았다.

  

 

 “…오랜만이야. … 잘 지냈어? 난 잘 못지냈어, 혜준아.”

 아, 여전히 너는 나를 울게 하는구나.

 참아왔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왔다.

 

 

 아,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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