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ing
written by. 구자
![02. [유진혜준] Crossing_구자(이미지).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9e4679_6ad472d84e1d4c768cb4d7b3eba5aa05~mv2.png/v1/fill/w_781,h_226,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02_%20%5B%EC%9C%A0%EC%A7%84%ED%98%9C%EC%A4%80%5D%20Crossing_%EA%B5%AC%EC%9E%90(%EC%9D%B4%EB%AF%B8%EC%A7%80).png)
“Tomorrow, this branch will proceed to close. (내일부터 지점 폐쇄 들어가겠습니다)”
지루하다.
“Please, please reconsider the issue of closing. (부탁드립니다. 지점을 폐쇄하는 문제는, 재고해봐 주십시오)”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
하품이 삐져나오는 걸 막으려 속으로 삼킨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오래 앓던 안구건조증 때문인지 눈물은 차오르다가도 하품을 삼키는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반복했다. 덩달아 뻑뻑해지는 눈을 연신 깜박이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다는 게 답답했던 찰나였다.
"...Can you hand me those tissues? (…나 휴지 좀 건네줄래?)”
옆자리에 앉은 섀넌이 회의 내내 각 휴지 한 통을 다 써버릴 기세로 코를 훌쩍댔던 것도 다 환절기 탓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집중이 안 된다는 증거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계절 나부랭이나 생각하고. 서류 몇 장을 더 뒤적여 봐도 더 이상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아는 마당에 협의 내용을 뭐 하러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나 싶었는데, 결국은 자기네들 사정을 봐달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섀넌의 말이 맞았다. 상대에겐 여지따위 남길 게 없는 깔끔한 최후통첩이었다.
보통과 같았으면 뉴욕에서 처리하고 있었을 입장이라 그런 걸까. 이런 식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옆에서 돕는 것이라 어려울 게 없었음에도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은 굳이 대상이 한국인 상황에 자신을 데리고 온 저의는 무엇인지 골몰하게 만들었다. 회장의 요청인지 섀넌의 자발적인 선택인지 알 수는 없었어도 이런 식으로 마음에 걸릴 여지를 꼭 하나씩은 남기고야 마는 누군가의 고약한 성미에 신경질이 났다. 이러다 아킬레스건을 들키는 건 아닐지 걱정하고 숨기려 포장하는 일에도 이골이 난지 한참이었는데.
“There’s no more negotiation, that’s it.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끝이에요.)”
주위를 에워싼 지루한 공기와 몽롱함 사이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정의 촉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별게 다 거슬렸다. 바깥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누군가의 분노 어린 목소리와 더불어 나란히 옆에 옆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살려달라 애원하는 듯한 표정, 혹은 바람에 구르면 빈 소리가 날 것 같은 공허한 얼굴들이 자꾸만 눈으로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더 살펴보지도 않았을 타인들의 모양새가 거슬리는 틈으로 집요하게 스며드는 연민 따위의 감정이 껄끄럽게 느껴진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Hey, do you hear the noise? (혹시 밖에서 나는 소리 들려?)”
“The protestors? (시위하는 사람들?)”
바깥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느꼈을 즘,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벽 한쪽을 채운 창문을 타고 고스란히 넘어오는 울음소리에 귓가가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톤을 캐치하는 예민한 청력은 이럴 때마다 유독 성가시게 굴고는 했다.
“I think it’s getting worse.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Don’t mind it, they always do. And please stop whispering you’re making me distracted. (늘 저러니까 신경 꺼. 그리고 그만 좀 속삭여, 집중 안 되잖아.)”
가뜩이나 여유를 부려도 되는 상황에 작은 요소들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스트레스로 불편해하는 기색이 티가 났는지 섀넌은 제 쪽을 흘긋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종종 노골적인 표정을 보내기는 했어도 속에서 안타까워하는 건지, 재수 없어 하는 건지, 혹은 가엽게 여기고 있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흐릿하게 보였다.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성가신 마당에 저 사람이라고 안 그럴 리가 없었다. 이쯤 되니 그저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딱히 생각조차 나지 않는 이 상황에.
잔뜩 찡그린 채 경계를 세우고 있으면서도 공격해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아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수많은 생각들의 틈으로 선연하게 느껴지는 기억의 공백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과 기억의 늪에서 떠오르는 빈칸에는 온통 ‘알 수 없음’이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무얼 놓치고 있는 걸까.
어느새 회의가 끝난 건지 모두가 나간 후의 회의실은 흡사 폭풍이 휩쓸고 간 뒤의 황망한 폐허 같았다. 가라앉은 공기마저 발 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건지 일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좀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연무 속에서 길을 찾아 안개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처럼 모든 감정의 흔적을 뒤집어 확인해보는 것 말고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Hey Shannon, did I miss something? About the meeting or anything? (섀넌, 혹시 내가 놓친 거 있어? 회의든 뭐든?)”
“Well, I can see you’re acting weird today, you’ve already asked to me about things you wouldn’t normally ask. (다른 것보다도 네가 오늘 이상하게 군다는 건 알겠어. 너 평소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도 물어봤잖아.)”
“I know it sounds crazy, but I honestly don't understand why I came to Korea, with you.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내가 왜 너랑 한국에 왔는지 조차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거든 지금.)”
“..Seriously? We came here because of the financial crisis in Korea, Bahama decided to proceed the investment screening, and the IMF already… (…진심이야? 한국 금융위기 때문에 바하마가 투자 심사 진행하기로 해서 오게 된 거고, IMF에서는 이미…)”
시간의 수평선에서 시작과 끝이 뒤집힌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건물의 정문을 통과하여 문턱을 밟는 순간 들린 세 음절과 바깥의 풍경이 기묘하게 섞여들어갔다.
‘하루는 고모가 울면서 유치원에 데리러 오신적이 있어요.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고모 손에 이끌려서 간 곳이 재영은행 앞이었거든요. 제일 먼저 보인 건 전단지를 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었고… 아빠는 그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잡고 울고 계셨어요.’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정문을 향해 달려오는 인영이 아른거렸다.
‘그러다가 앞으로 달려가셔서… 어음이 막혔다고, 살려달라고 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안 잊히더라고요.’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조심스레 손을 잡아오며 자신이 먼저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던 이혜준이 들려준 건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랜 시간 제 삶을 구성해왔던 두려움의 시작은 사실 그때였던 것 같다고, 잊히지 않는 어린 날의 아픔이 그저 흉터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재생을 반복하는 여린 살갗처럼 자신을 매번 파고드는 것처럼 느낀다고, 그래서 나는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켜야만 했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오만하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당신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실 나는 짐작할 수 있었어. 누군가의 아픔을 무기로 사용해본 적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당신이 내게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해명하지 않아도 돼.
단순히 나누는 것을 넘어 이 이야기를 스스로 꺼낸 이유가 무엇일지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교만한 태도로 그의 의중을 넘겨 짚었고, 그렇게 이혜준의 심연까지 다 이해할 수 있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지점장님…! 지점장님, 살려주세요… 아시잖아요, 어음이 안 돌아서 부도가 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습니까!”
뭉개져 보였던 흐릿한 인영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지점장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한참을 볕에서 서있었던 것인지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에 섞여 흘러들어가는 것조차 보일 것 같았다. 회의실 안까지 들렸던 울음 섞인 목소리는 기력을 다한 것인지 땅에 곤두박질쳤다 다시 튀어 오르지도 못한 채 아스팔트 바닥 위로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바둥거리며 붙잡아오는 남자의 손길을 우악스레 잡아떼는 청경들의 움직임 사이로 작은 인영이 이쪽을 향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어른들의 울음소리와 고함 소리 다 싫었지만 그보다도 더 싫고 무서웠던 건 그런 아빠와 우리를 바라보는 은행 사람들의 시선에 어린 경멸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일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아빠가 저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절박한 사람들을 향해 보내는 비웃음 섞인 시선도 칼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는 나이였으니까요.. 고모가 아빠한테 집에 가자고 이야기하라고, 혜준이 말은 들으실 거야 하시면서 절 어르셨어요. 땅에 주저앉은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달려갔는데… 절망스러워하고 계시다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놓던 입가에는 약간의 긴장과 설움, 옅은 공포심이 걸려있었고 마치 멀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하듯 어조에는 생경함이 어려있던 것 모두 직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숨을 한 번 고르며 말을 찾던 호흡의 끝, 파- 하며 터져 나오듯 떠오른 맑은 빛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아이의 작은 발걸음 소리는 코웃음 치는 지점장과 섀넌의 뭉뚱그려진 말소리에 뒤섞여 귓가에 웅웅댔다. 발목에 힘이 부치는 듯 한 번 삐끗하다가도 이내 또박이는 발 걸음으로 다가와 제 아버지의 품을 감싸는 아이의 등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꾸며진 작은 가방이 달랑이고 있었고, 큼지막하게 매직으로 쓰인 검은 이름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끝을 기어코 마주하게 만들었다.
‘풀잎반 이혜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작은 뒤통수는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돌려 비스듬한 각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원망과 불안이 잔잔하게 요동하는 눈망울에는 어설프게 닦아낸 눈물의 흔적이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제 허리께를 조금 넘을 듯한 키의 아이는 한참 더 높은 곳에 있는 눈을 바라보는 게 수고스러울 법 함에도 불구하고 맞닿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 이혜준의 시선과 몸짓 하나하나에 서린 누군가를 향한 순수한 미움은 이토록 솔직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서로를 안 이후로 함께 보낸 시간이 지닌 무게에 관한 것이었을까. 이혜준의 오롯한 선택으로 가능했던 ‘우리’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니고 있었을 스스로의 믿음과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대가였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존재가 당연하다고 믿고 싶었던 마음은 어리석었다는 증명이었다.
시계 초침을 힘껏 잡아당기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할 수 있을까 싶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쉽사리 나오지 않는 마음을 붙잡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물기어린 눈으로 시선을 좇는 이 어린 이혜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하며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세계는 붕괴하고 있었다. 부서져가는 형체들의 틈으로 높게 뜬 빛들이 산란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이혜준과 나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혜준아”
“…”
“… 미안해…”
입을 여는 순간 목이 메었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게 할 수 없는 마음의 소용돌이에서 겨우 끌어올린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이 흐려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보태려 입을 몇 차례 열었다 닫았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무한한 그리움과 서글픔의 회오리 속에 홀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크고 나서야 한 생각이지만… 어렸을 때의 나를 보게 된다면 지금의 내가 안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 안겨본 적이 많이 없었으니까.’
가라앉은 눈꺼풀이 천천히 깜박였다. 허공으로 손을 뻗어 흐려지기 시작한 형체를 품에 안는 순간 울음이 밀려왔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소리는 숨을 쉬기 위해 들이 마시는 벅찬 호흡에 딸려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했던 연인의 고통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색채를 띤 실재하는 기억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후회였다. 부서져가는 어린 세상을 끌어안으며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와중에도 뺨에 느껴지는 온기는 따뜻했다. 왜 이런 순간에도 당신은 나를 어루만지는 걸까.
“유진 씨.”
낮고 따뜻한 목소리가 일렁였다. 목소리를 쫓아 손을 내밀자 끝에서부터 옅은 온기가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목 끝에 걸려있던 공기는 헐떡이는 숨과 함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기억들과 감각들은 아지랑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우주의 진공으로부터 부유하는 현실로 떨어진 지금, 마치 궤도를 잘못 계산해버리는 바람에 거쳐와야 했던 시간의 여행지에서 여정을 시작했어야만 했던 이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유진 씨..?”
꿈이었다.
일순간 호흡이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품에 안겨있었던 어린아이의 온기는 생경했지만 이미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유진의 눈가에서는 채 닦이지 못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향에 가깝지만 옅게 느껴지는 익숙한 비누냄새, 천에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온기가 맞닿은 감촉까지 이곳은 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각들 만이 존재했던 세상에서 불현듯 현실로 무방비하게 떨어진 나에게 주어진 일은 현재라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받아들이는 것뿐인가, 유진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느려지는 호흡의 속도에 맞춰 혜준이 가슴팍을 도닥이고 있었다. 온기가 모자란 손의 서늘한 촉감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가볍게 눌러주며 옅은 압을 남기는 듯 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결에 맞춰 조심스레 넘기는 손길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안도감과 서러움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미안, 나 때문에 깼죠.”
갑작스레 말을 한 탓인지 목에서는 가래 섞인 소리가 났다. 코까지 막혔는지 발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감기 기운에 기력 없이 웅웅대는 소리로 이야기를 한 것 같은 소리에 어이없게도 유진은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늦은 밤인지 혹은 이른 새벽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혜준이 보내는 온기와 걱정 어린 눈빛은 칠흑을 뚫고도 선연히 느껴지는 듯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급하게 일어나 어지러움에 휘청이는 몸이 제법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을 알면서도 유진은 등으로 느껴지는 곧은 시선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찾아든 형광등의 불빛에 눈을 찡그리다가도 채 벗어나지 못한 무의식의 여운은 다시 눈물을 차오르게 만들었다.
후회 혹은 연민 같은 깔끔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다양한 갈래의 서글픔들이 파도처럼 몰아친 셈이었지만 품에 안겼던 작은 온기가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던 두려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유진은 그 사실이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저질렀던 일들의 실체, 사건이라는 것은 저지른 사람보다 그 속에서 모든 걸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기억으로 정의되는 법이었다.
세면대에 부딪히는 물의 마찰음과 함께 유진의 울음소리가 흘러가는 동안, 혜준은 화장실 문에 기대어 앉아 생각했다. 좀처럼 허둥대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피해야 했고, 울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잠꼬대를 할 정도의 꿈은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 날의 이른 취침으로 새벽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혜준의 눈에 처음 보였던 건 식은땀과 함께 잔뜩 울상을 지은 채 새된 숨소리를 내뱉는 유진의 얼굴이었다. 한참을 꿈속을 헤매고 있었는지 짙어지는 미간의 주름과 함께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는 어느새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이의 목소리로 바뀌었고, 무언가를 쥐려는 듯 다급히 움직이던 손이 멎는 순간에는 손등을 덮어 맞잡아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기 시작하고 나서야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렀던 게 너무 늦었던 걸까. 혜준은 잠시 생각했다.
“유진 씨… 문 좀 열어줄 수 있어요..?”
한참 동안 인기척을 내지 않던 문의 너머로 말을 건넸다. 진공에 가까운 백색소음만이 오가는 순간, 발밑의 그림자로 느껴지는 움직임의 부재에도 유진이 손잡이를 잡았다 떼며 망설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머지않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괜찮은 거예요? 나 좀 봐봐요. 혜준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좀처럼 붓는 일이 없는 얼굴의 눈 주위에는 열꽃이 핀 듯 눈물자국이 어려있었고 속으로 삼켜야 하는 말들을 입속에서 낱말 하나하나 짓이기는 것인지 힘을 준 턱 끝이 동그라니 모여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슬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혜준.”
“응..?”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안고 있어요 우리.”
피하는 법 없이 오롯하게 시선을 맞춰오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었을까. 잠시 잠깐 사그라들었던 마음이 얼굴을 들고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혜준의 눈에는 이렇게도 면역이 없었다. 유진은 속에서 울렁이는 파도를 어떻게든 잠재우려 했다. 옷깃을 애처로이 쥔 폼이 부끄러웠지만 그렇게라도 품에 안고 숨을 고르고 싶었다.
“유진 씨 자다가 내 이름 불렀어요..”
“…”
“미안하다고, 나보고..”
“…”
“…걱정돼요.”
“…”
기울어가는 어둠 속으로 무방비하게 내던져진 마음이 형체를 잃고 서성이듯 유진은 혜준의 얼굴을 피해 애써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 마음들이었다. 이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꿈이란 건 본래 휘발성이 강한 존재였고 결국 삶에 남는 건 언젠가 사라지고 머릿속에서 재조립 될 기억이 아니라 그로부터 얻은 감정의 흔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슬퍼하고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현재의 행복을 위한 대가였을지도 모르는, 낫지 않는 상흔의 흔적은 제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착각했던 것보다 더 큰 존재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 순간이 죄스러웠다.
“꿈을.. 꿨는데..”
“…”
“처음에는 내가 그냥 일을 하러 간 줄 알았는데… 묘하게 기시감이 자꾸 드는 거야. 꼭 이미 와봤던 곳, 이미 해봤던 일인 것처럼. 그런데도 무언갈 놓치고 있는 기분이 자꾸 괴롭히는 거예요.”
“…응.”
“한참을 갈피를 못 잡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는데, 내가… 1998년도에, 재영은행에 간 거더라고. 바하마 입장으로.”
“…”
“그걸 깨닫는 순간 저… 저 멀리 오른쪽에서 아이 한 명이 달려오는데,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겠더라. 아, 꼬마 이혜준이다.”
“…”
“그때 당신이 해줬던 이야기 속의 아이는… 이랬구나…”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구나.”
“그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등을 붙잡고 겁먹은 채로 울고 있는데.. 나는.. 내가 그렇게 만든 거라는걸..”
“…”
“…그제서야 당신이 평생 동안 겪어왔을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미안했어요.”
“…”
“내가 과거에 했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런 상처를 남겼구나… 이혜준도 겪은 일이겠구나.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겠구나.”
“유진 씨.”
“너무 늦게 이해해서 미안해요. 혜준.”
살다 보면 가끔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을까라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만약 도망칠 수 있는 삶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마음에 절벽을 세우고 끝에 매달린 채 언제고 다시 떨어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라는걸, 삶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매일같이 마주하며 평생을 살겠다고 맹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혜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견뎌야 했던 시간 속에서조차 스스로의 신념에 따른 결정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먼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정이 아닌 현실의 문제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나아질 거야,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닌 당장의 생을 위해 선택해야 했고, 바꾸어야만 했다. 그렇게 촘촘히 쌓인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혜준으로 하여금 지켜야 하는 것들 앞에서 유독 용감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들어야 할지, 어떤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마음만을 믿고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던 때에도 그랬었다. 내가 인식하는 ‘사람’이라는 반경 안으로 들어온 존재, 지켜야 하는 마음이 된 한유진에게 서로의 삶에 좀 더 깊게 관여하는 사이가 되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던 날 또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선택한 길이었던 것이다. 혜준에게는 이 모든 과정 또한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살기 위해 내린 결정인 셈이었다.
“있잖아요 유진 씨, 나 그 이야기했을 때… 날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
“나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필요했었거든요.”
“…”
“근데 어느 날 문득 딱 그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이 사람에게는 내가 가진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싶다.”
“…”
“나에게 그만큼 유일한 사람이니까, 한유진이라는 사람은.”
“…”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지키고 싶어서 선택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 후회해본 적, 난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아요. 어쩌면 내가 당신을 이해하게 된 순간일 수도 있으니까. 조곤조곤 말을 끝낸 혜준의 말 끝에는 살풋한 웃음이 서려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요. 이혜준은 정말 진짜..
오랫동안 품에 안겨있던 혜준이 꼼질거리며 유진의 몸을 침대로 이끌었다. 작은 손이 이끄는 더딘 속도에 따라 함께 걷는 발소리가 나지막하게 방 안을 울렸다. 혜준으로부터 옮겨온 따뜻한 숨은 가슴께를 간질거리다 품을 뉘듯 목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유진의 입술로 옮겨 왔을 즈음엔 서로에게 가장 적당한 온기가 되어 넘실대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온도를 나누고 삶을 함께하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자각의 순간이었다.
“아, 근데 그거 알아요?”
“응?”
“한유진 씨 지금 눈코입 다 부어서 붕어 같아요”
혜준은 손가락을 뻗어 차례대로 눈과 코, 입술을 쿡- 하고는 눌러보았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서로만이 유일하게 아는 각자의 풀어진 모습이 있다는 게 문득 애틋해지고는 했다. 호선을 그린 입술의 선을 따라 양옆으로 움직이는 곧은 손가락을 놓치지 않고 입술로 베어 무는 유진이었다.
“.. 별로예요?”
“아뇨. 좀 귀여워 보이네요.”
“이혜준 앞에서만.”
“사실 그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네.”
“나도 꿈을 꿨는데… 좀 이상하고 신기했거든요..”
침대에 몸을 묻은 채 바로 누운 유진의 상반신 위로 혜준이 턱을 괴어왔다. 무슨 꿈이었어요. 잠기운이 묻은 눈을 끔벅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혜준의 뺨에는 달이 쏟아낸 빛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코를 훌쩍이며 무슨 꿈이었는지 묻는 유진은 제법 진정된 모습이었다. 가팔랐던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혜준은 시간의 추를 기울이고 있었다.
“택시에 타고 있던 것부터 기억이 나요. 비가 와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기사님이 대뜸 거기엔 어쩐 일로 가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이미 목적지를 향하는 중이었던 거죠. 창밖으로 보이는 길들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어요.”
“어디로 가는 길이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이름을 듣고도 몰랐는데 코너 한곳을 도는 순간 와본 적이 곳이라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여기는 당신이 말해줬던 도넛 가게, 저기는 자주 놀러 갔다고 했던 공원의 입구인데… 그러면 나는 지금 뉴욕인 거구나. 근데 분위기가 조금 달랐어요.”
“뉴욕을 다녀왔다고요?”
“정확히는 꿈을 꾼 거지만 뉴욕이었어요. 들어봐요.”
“알았어요.”
기묘한 대화의 흐름에 두 사람 모두 쿡쿡 웃고 있었다. 내가 꿈에서 서울을 다녀온 사이 당신은 뉴욕을 다녀왔다고요?
“암튼 그렇게 도착하게 된 곳이 좀 오래된 빌라 같은 곳이었어요. 입구에는 낡은 판자들이랑 잡초 같은 풀들이 있었고, 우선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발을 옮기려고 했는데 저쪽 한구석에서 누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소리에 이끌려서 들어간 거죠. 근데 가보니까 어떤 조그만 남자애가 비만 간신히 피한 채로 건물 옆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보려 하는데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어요”
“… 비창이었구나”
“…나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만나고 왔나 봐요.”
숨소리 하나 새어나가지 않는 순간이었다.
지금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았고, 작은 몸을 더 작게 만들어 웅크리고 있던 어린 한유진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급하게 뛰쳐나온 길이었는지 반쯤 벗겨진 슬리퍼와 그마저도 신지 못한 한쪽의 발은 이미 빗물과 모래에 젖어들어가는 중이었다. 몸을 옹송그린 채 무릎에 고개를 묻고 훌쩍거리던 유진은 바닥에 부딪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손바닥으로 눈물을 찍어내고는 고개를 돌려 모른 척을 했다.
“유진 씨 슬리퍼 한 짝 빼놓고 나왔던데요”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집요하게 얽혔다. 약간의 혼란과 기묘한 설렘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얼 위해 서로의 가장 연약했을 시절을 만나고 오게 된 걸까. 답을 구하지 못할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 싶어졌다.
“.. 어느 쪽이요”
“어… 오른쪽.. 이거 말해준 적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시나리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기대하고 싶다는걸.
“…어땠어요 내 모습.”
“눈물을 참고 있었어요. 쪼그려 앉아있길래 옆에 가서 앉았는데 자리를 피했고.. 근데 그게 더 서럽게 만들었나 봐요. 등을 한참 두드려줬어요.”
“…”
“.. 원래 눈물이 많았어요?”
“좀. 그리고 그날은 유독 서러운 날이었어요.”
꿈속의 유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혜준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입술만을 움직이다 피할 길이 보이지 않는 시선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던 아이는 품에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망설임 하나에 한 마음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새하얀 색이 나는 듯한 약품 냄새 가득했던 어머니의 세탁소와, 불시에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손을 대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가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끝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차근차근 뱉어낸 아이에게 혜준이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옆에서 가만히 듣는 일뿐이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유진의 얼굴에 스쳤던 메마른 절망과 현실에 대한 뼈저린 서러움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선택의 뿌리 끝에는 사실 두 사람의 삶을 오랜 시간 동안 구성해왔을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가끔 이렇게 우리가 형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닮았다고 생각했던 게… 결국 당신이 언젠가 내게 말했던 그 엿 같은 감정들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고… 그랬어요.”
“…”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이 작은 한유진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그랬는데.”
“다른 건 말해줄 수 없어도 이런 감정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왔어요.”
“…”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고, 확신하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렇게 헤어지고 혼자 걸어서 되돌아오는 길에 서서히 잠이 깼어요. 눈을 뜨고 나서야 미심쩍었던 기분이 꿈이라서 그랬구나 싶으면서도 사진 속에서나 보던 당신의 어린 모습이랑 많이 닮아있던 얼굴이 생각나고.. 실제로 그랬을까 궁금하고. 꿈결에 젖어서 한참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약간의 눈물이 고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끝맺은 혜준을 바라보던 유진이 조심스레 손에 깍지를 껴왔다.
"이혜준."
"응."
"반가웠고, 많이 미안했고, 기특했어요. 어린 이혜준."
"..."
"고마웠어요."
그 모든 순간을 겪고도 우리를 선택해 줘서.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까지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
"진심이에요."
"알아요."
어린 당신에게 남긴 말이, 나를 찾아오는 길이 되기를 바랐거든요.
인연이라는 수많은 경우의 수 속에서 서로의 기억을 가로지를 운명은 몇 퍼센트나 될 수 있을까. 각자의 선택이 만들어 낸 길의 끝에서 만나 서로를 마주 보게 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궤도를 그려나가게 될까. 수많은 질문들 사이로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허무맹랑한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최선의 방식으로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된 이 순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려왔던 대로 그려가는 일. 그리고 이렇게 잠시 잠깐의 순간을 붙잡는 일.
혜준이 조심스레 유진의 어깨를 안아왔다. 우리, 이렇게 잠깐만 안고 있어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