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아
written by. 가름끈
![01. [유진혜준] 닿아_가름끈(이미지).jpg](https://static.wixstatic.com/media/9e4679_da60a01eaa664ae7910aaed56e5b6c55~mv2.jpg/v1/fill/w_600,h_277,al_c,q_80,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01_%20%5B%EC%9C%A0%EC%A7%84%ED%98%9C%EC%A4%80%5D%20%EB%8B%BF%EC%95%84_%EA%B0%80%EB%A6%84%EB%81%88(%EC%9D%B4%EB%AF%B8%EC%A7%80).jpg)
“그래야, 내가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당신한테 다가가 볼 수 있어요.”
* * *
동장군을 달래기 위한 축제로 피워놓은 불 앞에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에게서 쨍한 소리의 자장가가 들려왔다. 유진은 갈 길을 멈추고 소리의 출처를 찾아 몸을 돌리고 숨을 골랐다. 눈앞에 입김이 서리게 흐려졌다. 겨울은 세상 모든 것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매서웠지만 바람에 실리는 잠깐의 온기는 너그러이 둔 듯했다. 유진은 제 귀에 맴도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지우려는 듯 한 번 더 숨을 뱉었다.
‘유진아, 미안해. 그래도 살아.’
겨울만 되면 고뿔처럼 어미는 악몽으로 찾아왔다. 차라리 곱고 어여쁜 분내 가득한 모습으로 오면 좋으련만. 강이 얼어붙은 추위 속 양반들의 놀음에 목청을 내다 얻은 병으로 야윈 병자의 모습으로, 흐르던 피가 멈춘 순간의 모습으로 매일 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진은 아이들 곁으로 한 발짝 가까이 갔다. 푸른 새벽 저의 머리맡에서 들리던 자장가가 어머니가 찾아오는 이유를 알려 줄 수 있을까. 유진은 시린 공기를 수욱 철렁거리는 배 속에 집어넣고 다시 뱉었다.
“천한 것들의 노래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뜻도 없고, 엉망이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그 천한 것들 사이에서 자라서.”
오늘 저의 수행을 굳이 자처한 나행수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적당히 욕심 있는 이라 여겼는데 그저 돈에 눈이 먼 치였다. 저 굽실거리는 꼴을 보기 싫어 조만간 갈아치우리라 마음먹은 유진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홀로 귀가하겠다며 나행수를 물렸다. 유진은 다시 찬 공기를 맡았다.
그는 늘 밭은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어미의 간절함과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이들이 베푼 동정심으로 생을 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아이는 기적처럼 손에 꼽히는 상단의 도방까지 올라섰다. 대방 병학의 눈에 띈 우연을 기회로 잠이 두려울 일들을 하며 악착같이 산 결과였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아 돈을 쥐며 살고 있는데 어미는 여전히 저에게 살라 한다. 이생에 있으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 곁에서 살라는 것일까. 유진은 해가 거듭될수록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죽어야겠구나.”
한숨 같은 말이 허공을 울렸다.
“고하겠나이다, 어머니.”
얼음같이 진중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맑은 내음이 귀와 코에 들어찼다. 유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향기를 쫓았다.
“몸이 약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죽어가며 이 땅의 어머니에게 자식의 안녕을 부탁하는 노래이지.”
검푸른 바다에 녹아가는 하얀 눈과 같은 여인이 곁에 서 있었다. 저보다 얼굴 하나는 더 작지만 개의치 않고 제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는 흑요석 같은 눈. 설원에서 빠끔히 홀로 내놓은 겨울눈에 유진은 홀리는 것 같았다. 제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에 마디 끝이 저릿하기도 했다. 어머니, 어머니가 노래할 때 저런 눈이셨던가.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겁박이군.”
불에 어렴풋이 밝혀지는 말간 얼굴이 내음과 비슷했다. 숲의 깊고도 연한 내음이었다. 유진은 잠시 멈췄던 숨을 다시 쉬고 태연히 대꾸했다.
“모든 어머니가 살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고하기엔 애처롭지 않은가.”
유진을 보던 여인은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유진은 여인의 뺨에 넘실거리는 붉은 불이 제게 옮겨붙는 것 같았다.
“자네는 그렇지 않은가.”
유진의 숨이 길어졌다. 그래, 슬펐다. 자신은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이었고, 상상으로만 남은 그리운 이에 대한 부름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결로 몸 어딘가에 금이 가는 생소한 감촉에 유진의 가슴이 달궈졌다. 감춰온 비밀이 홧홧히 떠올라 그의 눈에 넘실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새겨지며 눈두덩을 짓눌렀다.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유진을 뒤로하고 여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들이 있을 법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몇 번 꿈뻑이던 유진이 뒤늦게 아이들이 사라진 쪽으로 가봤으나 여인은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의 발이 결국 멈췄다. 신기루를 본 것 같았다. 허둥이던 제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비식 웃다 좌판의 빨간 매듭 팔찌에 눈이 갔다. 그 여인의 뺨에 비치던 불꽃과 같았다. 유진은 값을 치르고 천천히 팔찌를 손에 들었다. 손에 얽힌 붉음이 썩 맘에 들었다. 그런 유진의 그림자가 조용히 길어졌다.
“찾았습니다.”
“금일 들거라.”
그림자가 사라졌다. 대방 병학이 던진 후계자라는 덩어리에 부스러기라도 핥겠다는 들개 떼들이 몰려들었다. 자신을 탐탁치 않아 했던 선비 나리가 목줄을 잡은 들개들은 제가 가진 것들을 뒤에서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었다. 어찌나 감쪽같던지 꽤 손실을 입고서야 알았다. 의로운 상인이라며 어딜 가든 존경받는 도방 이헌 같지 않은 행패였다. 이헌이 못마땅해 그지 않는, 승냥이라 불리는 자신이 하던 짓과 같지 않은가.
유진은 행선지를 바꿨다. 코끝에는 그림자가 잡아챈 들개의 혈향이 감돌았다. 자신도 고결한 척하는 선비나리가 아니꼬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반격할 요량이다. 굴욕적으로 목구멍에 밥을 삼키던 시절의 저와 닮은 아이들에게 바라고 마지않던 삶에 이어주는 것으로. 아이들도 독기 없이 팔랑거리는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게다. 유진은 팔찌를 속 깊숙이 넣어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 고하겠나이다 어머니.
오늘도 찾아오십니까.
* * *
깊은 산의 음습함과 계절의 사나움이 살갗을 축축이 적셨다. 유진은 내리막길에서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는 걸 찬찬히 눈에 담았다. 한동안 위태로이 타던 촛불에 익숙했던 눈에는 불편한 광경이었다. 유진은 잠시의 사치를 견디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에 묶인 검은 비단에 초점을 맞췄다. 매끄러운 비단결을 따라 유진이 침잠했다. 자신이 확실한 맥을 잡아 묘수를 내고 진두지휘한 비단길이나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헌의 끄나풀들은 하나, 둘씩 도려내지고 있고 길을 잃은 아이들을 모으는 것도, 아이들의 새로운 집이 될 양반들의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방금 기지가 될 곳도 확인해보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천혜의 조건이었고 상품들을 모아놓는 곳도 거칠지 않았다. 혹시 제가 이미 잃었다 생각했던 다른 것이 반응하는 것일까. 이제 와서 다른 수를 고민하고 싶은가. 유진의 안면에 자조가 맴돌았다.
작은 인기척과 바스락하는 소리가 채였다. 붙은 사람은 모두 떼어내고 올라왔건만. 유진은 혀를 차곤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이동했다. 가까이 가니 나무에 작은 인영이 가려져 있었다. 아이인가? 유진은 검에서 손을 떼고 일부러 기척을 내며 천천히 다가섰다. 아이라면 연고를 확인해볼까, 그곳에 처음으로 입성할 아이일수도 있지 않은가.
“언니야?”
올 수 있는 자를 기다리는 건가, 오지 않을 자에게 버려진 건가. 자세히 확인하고자 나무 앞으로 가니 웬 여자아이가 피 흘리는 한쪽 무릎은 쫙 피고 나머지는 다리는 안은 채 올망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유진을 확인하자 눈에 가득 물을 고여 내기 시작했다. 경계심을 풀어 보이겠다고 히죽 입꼬리를 올려보기도 했으나 아이는 더 사색이 되었다. 영 곤란하게 되었다.
“아니, 아가야…….”
“아가 아냐!!! 언니!!!!”
아뿔싸. 이젠 숨넘어갈 듯이 울며 언니를 찾는다. 믿는 구석이 있는 아이였나? 야단났다. 기실 유진은 자신이 두툼하고 큰 몸집에 번들거리는 안광을 가진 영락없는 산적임을 몰랐다. 게다가 해가 진 후 눈에 띄지 않겠다 하여 그림자의 옷을 빌려 온통 검은 옷만 입고 왔으니 아이 눈에는 저승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날고 기는 상단 중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는 대환 상단의 대방에게 감히 누가 직언을 할 수 있으랴. 어찌 되었든 유진은 영문도 모르고 아이와 다섯 보 떨어진 거리에서 어정쩡히 손을 올린 채 다가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발만 들썩였다.
“마리야. 언니 여기 있어.”
그 목소리였다. 머루 같은 눈의 여인이 아이의 옆에 기척 없이 곧게 나타났다. 여인이 유진을 탐색하려는 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스윽 훑어보더니 곧 아이의 앞에 사분히 앉아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달랬다. 아이가 눈물을 그치자 상처에 짓이긴 약초를 무명천으로 단단히 묶어 붙인 후 아이의 주머니에 풀 무더기를 꾸역꾸역 넣어줬다. 아이의 눈망울이 커지자 여인은 미소를 짓곤 가뿐히 아이를 둥기 안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음이 멀어지려 할 때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았다.
“구면입니다.”
“자네 갈 길 가게나.”
“하늘이 뉘엿 물들어 가는데 산에서 아이의 소리가 들려서 와봤을 뿐이오. 해치려하지 않았소.”
여인의 걸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안겨있던 아이는 유진을 한 번 보더니 여인의 품에 고개를 폭 묻을 뿐이었다. 유진은 자신이 위협적인 존재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붙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자장가는 내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거였소. 듣던 이의 그리움이 넘쳤노라 생각해주면 안 되겠소?”
여인의 걸음이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아아, 여리고 약하기도 하여라. 유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 산 아래까지만 동행하면 어떨까 하오. 혼자보다야 여럿이 낫지 않겠소?”
여인은 대꾸가 없었다. 제멋대로 동의라 해석한 유진은 여인의 왼편에서 발걸음을 맞췄다.
산은 침묵으로도 대화하는 듯했다. 채 묻히지 못한 낙엽들이 밟혀 자박거리는 소리, 나무 사이로 절기를 알리는 바람 소리,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내는 울음소리. 유진은 그 소리를 잠시 여인의 이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꼭 부르고 싶은 이름. 그는 그녀의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꼭꼭 씹어 내장 깊숙이 저장하고 싶었다.
유진은 길을 살피는 척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여인의 얼굴엔 아주 새빨간 색이 아닌 노을의 주홍빛이 어른거렸다. 몽글한 이목구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파문처럼 일렁였다. 지난밤, 모닥불 앞에서의 여인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보다 내밀하고 더욱 아름다운.
“나무에 묶인 검은 비단은 자네의 것인가?”
갑작스러운 여인의 질문에 헛발을 디딜 뻔했다. 아닌 척 다리를 쭈욱 뻗으며 그렇다 답하니 일자로 입이 다물렸다. 여인이 산에 자주 드나들었나. 기지를 지을 때 입이 무거운 자들로만 올려보냈다 했었는데. 유진은 답지 않게 식은땀이 흘렀다. 이헌이 저를 떠볼 때는 콧방귀도 나오지 않았건만. 그저 비단이 제 것이냐 묻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쩐지 검은 속을 묻는 것 같았다. 혹여 어색히 말이 나왔을까 속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을 덧붙였다.
“바람을 쐬러 종종 나오는데 길을 잃을까 염려하여 걸어둔 것뿐입니다.”
“자네는 가지지 못해 서러워 보이네.”
여인과 유진의 눈이 맞부딪혔다. 제 눈이 타며 속에 있는 물들이 울렁였다. 무척이나 유감이었다. 나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저 여인은 알고 말한 걸까. 유진은 어느 순간 저를 압도한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워하는 것은 이곳에서 얻을 수 없을 걸세.”
“내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언하는 여인에게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다. 저가 찾고 있는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포기할 수는 없어 기어코 기어 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올라왔는지, 달을 보며 올라왔는지 궁금했지만 그저 묻어두었다. 물을 곳도 없고, 저가 의문을 품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 그저 기었다.
“소망이라도 품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유진이 가다듬고 싶었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마주하고 있는 여인의 눈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일렁이던 물이 제 눈께로 차올랐을 수도.
“그래서 서러워 보였나 보네.”
꿰뚫어 보는 눈이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 잠기고 말았다. 심연에서 길어낸 어둠이 저 여인의 눈에 담겨 고요한 호수가 된 듯했다. 유진의 몸에 따끔히 열이 올랐다.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들킨 수치스러움인가, 아니 저 눈에 빠져 죽고 싶은 열망인가. 명치서부터 달아오른 돌들이 저의 속을 두들기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여인이 우뚝 멈춰서더니 유진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인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 왜 그래?”
묻는 아이를 보는 여인의 낯이 난감했다. 유진은 때를 알아챘다.
“언니는 위에 두고 온 물건이 있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나리가 어떻게 알아요?”
“아까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줬지.”
여인이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은 눈꼬리를 휘었다. 손에 저가 원하는 것이 잡힐 듯했다. 아이는 의심스러워했으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려달라는 의젓함을 보였다. 유진은 그런 아이를 만류하며 제 등에 업었다. 아이가 꺼림칙해 하긴 했으나 여인이 구슬리자 결국 유진의 등을 탔다. 갸냘퍼 보이는 저 여인이 어떻게 지금까지 안아 들고 왔는지 모를 묵직함이 등에 짊어졌다. 유진은 아이를 업은 후 구부정하게 혜준에게 시선을 맞췄다.
“아이는 내가 바래다주겠소. 아이가 집에 없다면…….”
유진은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붉은 팔찌를 내밀었다.
“고을의 가장 큰 비단 가게에서 이걸 보여주며 한유진을 찾아왔다고 하시오. 아, 그대인 줄 알려면 내가 이름을 일러둬야 할 텐데.”
“……혜준.”
“혜준.”
“아이를 보러 갈 것이니, 터럭 하나 상하지 않게 돌려놓거라.”
“걱정 놓으십시오.”
혜준은 유진의 어깨에 턱을 기댄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작별을 고했다. 두 각 정도면 장승을 볼 수 있다고 상냥히 일러주기까지 했다. 저에게는 아이가 사는 곳과 까딱하는 눈짓이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유진은 굴하지 않고 비단 가게와 대환 상단을 기억하라고 받아쳤다. 혜준은 망설이다 황량한 나무들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걷다 돌아봤는데 연기처럼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혜준의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해가 끝없이 져가고 있어 유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이는 바르작거리더니 자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손이 간지럽게 녹는 듯했다. 유진은 어느새 제게 몸을 맡긴 아이의 온기를 느꼈다. 아직 자라고 있는 사람의 체온은 좀 더 높고, 크기는 생각보다 작았다. 좀 마른 것 같기도 한데, 이 몸으로 산을 어떻게 오른 걸까. 아이의 이름이 마리라고 했던가. 유진은 괜히 거추장스럽게 덜렁이는 검을 발로 툭 건드렸다.
아이는 유진을 경계할 때는 언제고 한 번 입을 열자 종알종알 말도 많았다. 죽도 끓여 먹기 어려워 혼자 약초를 캐러 왔다가 발을 헛디뎌 한참이나 산을 굴렀다고 했다.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울음만 삼키고 있는데 혜준이 나타나 치료도 해주고 슬쩍 봐도 값나가는 약초도 챙겨주고 집에도 가게 해주었다 덧붙였다.
“그런데 나리께서도 어렸을 때 친구를 잃어버리셨어요?”
“무슨 말이냐?”
“언니는 여기에서 친구를 많이 잃어버렸데요.”
많이 보고 싶나 봐요. 유진은 그 눈을 떠올렸다. 아이를 보던 눈은 제가 참 그리워하던 눈이었는데, 그 눈도 그리워하는 것이 있었나.
“나리 그거 아세요? 이 산의 산군님은 백호시래요. 옛적에 여기에 가뭄이 심하게 든 이후로 찾아와 아이들을 보살피시는 산군이래요.”
“호랑이면 사람을 잡아먹지.”
“아니에요! 산군님은 산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혼 길을 열어주는 분이랬어요!”
산군님이 저를 위해 언니를 만나게 해주셨나 봐요. 발을 동당거리며 들뜬 듯이 얘기하는 마리에게 산군이 할 일이 퍽도 없겠다며 쏘아붙인 그는 들썩이는 마리를 고쳐 업어 제 등에 다시 안착시켰다. 그저 생의 터전에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경외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 아닌가. 마치 저가 몇 푼에 달달 떠는 것처럼. 혹시라도 만약 산군이 정말 있다면 제게 붙은 혼을 떼어달라고 간청이라도 해볼까 싶었다.
유진은 산과 고을의 경계에 있는 따뜻한 연기가 솟는 낡은 집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서 아이를 내려주었다. 약초가 발린 무명천은 풀고 표식을 위해 가져왔던 검은 비단을 묶어줬다. 아이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뒤뚱거리긴 했지만, 한달음에 집으로 달음질했다. 마리에게서 거둔 무명천에 선뜻 베인 약초향은 혜준의 내음을 닮아 은은했다.
혜준, 그 여인이 제 심해 속에서 무언가를 길어냈다. 형체도 정체도 모를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 자신인지, 혜준인지 모를 것이었지만 그는 두려워졌다. 제 머릿속에 이름을 가진 아이는 더 이상 그 산에는 들일 수 없다.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그 산을 올라도 되는가. 눈을 감고 바람을 타고 날고 있다 생각했지만, 눈꺼풀 사이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완전히 저문 날이 유진을 서서히 덮어갔다.
* * *
유진의 발걸음에는 밤의 흔적이 없었다. 샛별을 보지 않았던, 귓가에 냉기가 돌지 않았던, 어머니를 보지 않은 밤이었다. 어슴푸레 했지만 분명 유진은 해가 뜨고 있을 때 눈을 떴다. 깨끗하게 빨아 제 방에 널어둔 약초물이 든 무명천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혹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녹음빛이 마리에게는 몸이, 제게는 마음이 낫는 약초였나 하는 어줍잖은 추측에 상쾌해졌다. 이헌의 반격이 꽤나 거세 촉박하다는 대행수들의 보챔도, 손수 지게꾼을 불러 쌀과 옷감을 챙겨 마리의 집에 가는 수고로움도 가벼웠다.
마리의 집이 보일 무렵 작은 인영이 산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혜준인 것 같았다. 유진은 지게꾼에게 목적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곤 그녀를 쫓아 산으로 들어갔다. 발자국과 형상을 따라가는데 과연 저게 정말 혜준인지 허깨비를 따라가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찬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제법 올라온 지라 나무들 너머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더 올라가면 더 넓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을까. 헌데 왜 여기에 올라왔지.
애초에 마리에게 겨울나기 양식만 전달하려 했는데 혜준인지 확실치도 않은 것에 헉헉대고 있었다. 이문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그의 방식에는 맞지 않았다. 뜻한 바 없는 손해와 예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저를 응시하는 혜준을 더 보고 싶었다. 생김새, 이름만으로는 부족했다. 여인을 이루고 있는 것들과 닿고 싶었다.
그때 조금 먼 곳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형체라 유진은 나지막이 혜준을 불렀다. 멈칫하던 소리는 제 방향으로 점점 커졌다. 유진은 거리를 좁히려 소리 쪽으로 다가가는데, 혜준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찾고 있었소?”
“혜준? 그대……?”
혜준이 여기 있다면 저가 맞이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유진은 재빨리 혜준을 등 뒤에 숨겼다.
“날 기억하는가?”
발자국의 주인공은 거칠한 낯의 낫을 든 흉흉한 사내였다. 유진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고을에 오기 전 고리대금을 정리할 때 빚을 진 자 중 몇몇이 식구들이 노비로 팔려 가는 꼴을 볼 수 없다며 난동을 부렸는데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자네가 자초한 일일세.”
사내는 망설임 없이 유진에게 돌진했다. 유진은 혜준을 옆으로 밀어내고 사내의 팔을 잡아 대치했다. 살수들과 훈련한 유진은 땅을 일구며 산 사내보다 요령 좋게 힘을 쓸 줄 알았다. 밀고 당겨지는 거죽 아래 숨겨진 혈을 누르며 제압하려 하자 사내는 광인 마냥 유진의 손을 물려 턱을 내밀어 딱딱거리며 닥치는 대로 씹어댔다. 유진은 순간 힘을 풀어 사내가 앞으로 혼자 고꾸라지려는 틈을 타 목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사내가 정신을 잃은 듯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피신을 위해 혜준의 어깨를 감쌌다.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상하다 여긴 찰나 혜준에게 펼친 어깻죽지에 뜨끈한 고통이 박혔다 빠졌다. 위기감에 혜준을 보호하듯 다시 앞에 서자 얼굴마저 시뻘게진 사내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혼자는 못 간다.”
사내가 유진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낫을 크게 휘둘러 유진은 그의 팔을 잡고 발목을 있는 힘껏 쳐 중심을 잃게 했다. 사내는 넘어지면서도 유진의 어깨를 우그러뜨릴 듯이 잡아당겼다. 유진도 그와 함께 넘어가며 엎치락뒤치락하며 아래로 굴렀다. 땅과 하늘이 뒤집히는 시야에서 괴성을 지르는 일그러진 얼굴과 벼려져 있는 낫이 눈앞에 지나가 유진은 발버둥을 치며 그를 떼어내려 했다. 갑자기 머리가 쿵, 무언가에 부딪혔다. 유진의 시야는 완전히 껌껌해졌다. 사내의 음성이 멀어지는데 그것이 정신이 놓여서인지, 거리가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 *
어머니, 저는 왜 유진이에요?
아름다운 보배라서 그렇지.
저는 왜 아름다운 보배에요?
유진이 태어나는 날, 저 높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단다. 그 별이 아마 우리 유진이었을 테지.
* * *
유진이 번뜩 눈을 떴다. 온몸에 두들겨 맞은 듯한 둔통이 빼곡했고 어깨에는 격통까지 지글했다. 천천히 상체를 세우자 고통이 밀려들어 왔지만 참을만했다. 바위가 자신을 멈춰 세우고 고통이 의식을 차리게 한 듯했다. 살아서 내려가기만 한다면 회복에는 별문제 없겠지. 해가 중천인 듯 아프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아, 혜준. 유진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핑글 어지러움이 돌았으나 발을 디뎌 버텼다. 그녀를 확인해야 했다.
질질 끌 듯 몸을 짊어지고 내려가는 유진의 시야에 이상한 현상이 포착됐다. 저 아래쪽에서 해와는 상관없는 빛무리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유진은 기이한 현상에 한쪽 손으로 어깨가 움직이지 않도록 지탱하며 빛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안개와 같던 빛 아래 저를 죽이려 했던 사내가 혈색이 사라진 채 가슴에 낫을 꽂고 누워있고 혜준은 그의 머리맡에 표정 없이 서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혜준이 무릎을 굽혀 앉고 사내의 얼굴에 두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혜준의 팔에 걸려있던 붉은 매듭이 살랑 흔들리더니 주변에 퍼져있던 빛무리가 한 갈래로 모였다. 갈래의 끝에는 불씨처럼 타닥이는 빛조각들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혜준의 손에 이끌리듯 사내의 입에서 도깨비불 같은 파란 빛구슬이 나오더니 길처럼 이어진 빛으로 향했다. 빛구슬이 결을 따라 흐르다 곧 불씨와 같은 반짝임에 닿자 한순간에 어두워진 것 마냥 빛이 사라졌다. 유진은 아직도 꿈을 꾸는가 했지만, 몸을 구석구석 괴롭히는 통증에 꿈이 아님을 자각했다.
혜준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여상한 표정으로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의 혈향이 맡아질 정도로 가까웠지만, 유진은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공포 혹은 경외, 당혹 혹은 희열. 유진은 눈동자만 굴려 혜준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혜준은 유진의 등 뒤로 돌아 가만히 낫에 찍혔던 어깨에 손을 댔다.
“나를 구하려 했는가.”
제 체온보다 높은 작은 손의 감촉이 피로 질척이는 의복 사이로 느껴졌다. 혜준이 닿은 어깻죽지를 시작으로 간지러운 몽글함이 퍼지며 온몸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굳었던 몸과 호흡도 단숨에 풀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을 오르기 전 그 몸으로 돌아간 것이다. 손을 떼고 다시 유진의 앞으로 온 혜준은 그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먼저 구해야겠어.”
“나를 구할 수 있소?”
유진은 그녀의 팔목에 걸린 붉은 매듭을 보고 붙잡듯이 물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혜준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혼을 다루는 기이함이나 제 몸을 고친 신묘함 때문이 아니었다. 오롯이 저를 들여다보는 이기에 유진은 절박했다.
“죽은 어미도 살라 하는데, 늘 죽는 것 같은 나를 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날 때부터 들짐승에게 버려진 비루한 이도, 사랑하는 이들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쓴 원통한 자도, 짐승처럼 돌에 맞아 죽은 불쌍한 치도 구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살 수 있어.”
혜준은 유진이 준 팔찌를 보이게 소매를 살짝 걷었다. 가늘고 하얀 손목의 붉은 색은 날 때부터 묶인 인연의 실이라도 되는 듯 선명히 어울렸다.
“따뜻해질 수 있어.”
혜준은 유진을 지나쳐 소복히 걸어갔다. 곧 바람만이 남았다. 유진의 다리가 풀리며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유진은 무릎을 끌어 사내의 앞으로 갔다. 빳빳이 굳어있는 생기 없는 눈에 공허히 자신이 비쳤다. 유진은 그 눈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외면했던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 쉬이 죽고 싶지 않은 두려움, 아등바등 걸리는 사람을 제물 삼아 살아온 자신에 대한 두려움, 질주를 멈추면 제게 돌아올 칼날에 대한 두려움. 스스로 원한을 올무처럼 걸어오며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다 자부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노라고.
발발 떨리는 피 묻은 손으로 사내의 눈을 감겼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사내의 시신은 외려 평안해 보였다. 아니, 비명횡사하게 만든 자신에게 고통이 한 짐 더 지워진 걸까. 사실 어미라 생각했던 것은 제가 이렇게 죽인 자들의 목소리였던 걸까. 오랜 세월 앓아온 겨울밤에 대한 답인 걸까.
유진은 혜준이 두려웠다. 혜준에게 다가갈 때마다 제가 야차처럼 뿌려둔 피칠갑 된 덫들을 온몸으로 확인하게 했다. 돌이킬 수 없게도 혜준에게 이미 유진이 한결 걸려있다는 것도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저 나로 너에게 뛰어들고 싶었을 뿐인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지만 남은 나무가 누운 사내를 염하듯 그림자로 얽혔다. 유진은 천천히 일어섰다. 제게 돌아갈 곳이 있는가.
* * *
그날도 달이 밝았다. 오가는 이야기들이 여리게 드러난 살을 저미는 것 같아 홀로 남겨졌을 때 연거푸 들이킨 술잔에 걸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채도방 측 첩자들은 모두 솎아내어 쓸모없는 자들은 산에 묻었습니다.’
‘아이들을 이동시킬 때 증좌는 모두 태울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등품으로 준비했으니 뒤탈은 없을 겝니다.’
유진은 제 처지를 곱씹어보았다. 환상 같은 만남에서 마주한 자신은 어느새 심연으로 거둬지고 관성처럼 알 수 없는 추동에 휘둘려지는 사내만이 남아있었다. 목전까지 칼을 들이민 이헌의 탓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작두에서 발 날로 걷는 자신의 기행인 것을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라는 소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은밀한 모임처에서 제 처소로 갈지자로 걷던 유진을 멈추게 한 건 혜준이었다.
인적 없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혜준은 유진에게 다가섰다. 유진을 세 보 앞에 두고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히 빛나는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유진.’
그립던 혜준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유진은 그 사실이 기꺼워 함박 웃었다. 기실 아이들을 확인한답시고 뻔질나게 산을 드나들고 답답하다는 핑계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온종일 산을 헤매기도 했다. 물론 한 번도 혜준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도 같은 길을 밟았으리라 생각하며 산 구석구석에 발걸음을 묻혔다. 혜준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많았다. 마리는 종종 비단 가게에 찾아와 유진에게 산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혜준의 이름을 얻은 날 오지 않았던 밤손님도 다시 제 자리를 찾듯 돌아왔다. 어디든 불길을 보기만 하면 어머니의 자장가가 자연히 떠올랐다.
‘혜준.’
혀에서 굴리는 이름이 참으로 달았다. 술이 달았던가. 유진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혜준이 저가 찾으려 하는 그 무엇인 것 같아 그저 좋았다. 유진이 한 발짝 다가서려 하자 혜준은 물러났다. 유진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고개만 갸웃했다.
‘너의 것이라 했던 검은 비단을 두른 이들로 산에 피비린내와 비명이 진동한다.’
유진은 모르는 척 눈을 휘었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혜준은 제 팔에 둘러있던 매듭을 풀려 했다. 유진은 그걸 보자 속이 낙하하는 듯했다.
‘혜준!’
유진의 외침에 혜준의 손짓이 멈췄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멈추겠다는 말인가.’
유진은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저가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취기에 얼굴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익숙한 당김이 지어졌다. 혜준이 손을 내렸다.
‘가엽구나.’
달을 가리듯 옅게 흩어지는 입김에서 유진은 상념을 거두고 속도에 집중했다. 곧 자신을 딱하게 여기는 여인에게 보란 듯이 갈 수 있는데 도통 무엇도 도와주질 않았다. 아이들을 관리하던 대행수는 얼마 전 관아에 뇌물을 넣은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별수 없이 도려내고 유진이 그 몫을 하고 있었다. 거래하는 곳에 유진의 얼굴을 내보일 수는 없기에 택한 차선이었다. 여기에 몇 시진 뒤에 새로운 집으로 갈 아이들을 모아둔 기지에 집채만 한 백호가 난동을 부린다니. 지키던 이들이 귀한 상품들을 빼돌리려 하긴 했으나 귀신같이 아이들을 가둬둔 곳에만 어슬렁거리며 위협하니 부리나케 제게 알리러 온 것이다. 하필 거래를 코앞에 둬 인력을 이곳저곳에 돌린 오늘 이 사달이라니. 마리의 이야기가 참이었던가.
유진은 생각을 털어내고 같이 산을 오른 그림자들에게 무기를 준비하라는 신호를 줬다. 검은 비단이 묶인 마지막 나무였다. 한껏 감각을 곤두세워 기민하게 사위를 살폈다. 기지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깊숙한 골짜기에 뒀다. 골짜기에서 사람이 밟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올랐던 길 하나뿐이었다. 산짐승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그득했다. 유진의 손짓으로 그림자들은 천천히 진을 만들어 포위망을 좁혔다. 상품을 가둬둔 처소의 끄트머리가 보일 때 갑자기 기이한 떨림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굴려 그림자들을 살피니 그들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순간 단말마 같은 신음들이 터지며 그림자들이 묵직하게 저 멀리 떨어져 내려갔다. 믿을 수 없는 크기의 백호가 앞발 만을 휘둘러 그야말로 사람을 날리고 있었다. 유진은 제 차례가 오기 전 정신을 차리고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팔을 간신히 들어 호랑이 쪽으로 활을 한 발 쏘았다. 막 그림자 하나를 더 날리려던 백호 발 옆에 쇳소리가 뾰족이 박혔다. 비껴가긴 했지만, 시선을 끄는 데엔 성공했다.
“상품들이 안에 있는지 확인해라!”
그림자들이 기지 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백호는 저를 쏜 유진은 보지도 않고 움직이는 그림자들에게 돌진했다. 유진은 근육을 팽팽히 당겨 화살을 제대로 백호에게 조준했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를 쳐내려 한 백호의 어깻죽지에 제대로 명중했다. 백호가 움찔하는 틈을 타 아이들의 처소로 가는 이들을 제외하고 제정신인 이들과 합세하여 날붙이들을 퍼부었다. 합공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꾀를 간파한 듯 날쌔게 피해 활과 검은 미미하게 거죽을 찢어놓기만 했다. 백호는 성가시다는 듯 크게 한 번 울부짖더니 몸을 거칠게 털어 주변을 물리고 다시 처소로 향하는 그림자에게 덤볐다. 유진은 놓치지 않고 강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기지에 거의 다 닿은 그림자가 백호에게 덮쳐지기 전 유진의 활이 백호의 목덜미에 박히는 게 빨랐다. 이번엔 꽤나 잘 맞았는지 백호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그사이 기지를 확인한 그림자가 무리에 합류했다.
“없습니다!”
“흩어져 내려가 찾아라!”
그 짧은 새에 어디로 도망갔다는 건가. 그림자들이 후퇴하자 백호가 그르렁거리며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그림자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까지는 처소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었던 것인가. 범상치 않은 싸움을 직감한 유진은 검을 꺼냈다. 등에 꽂힌 화살이 파고드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백호는 멈추지 않았다. 순간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달빛 아래 푸르스름한 눈이 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유진의 세상에서 저런 눈은 오직 한 명만이 가지고 있었다.
“혜준……?”
이름을 내뱉은 유진에게 백호가 덮치듯 날아들었다. 유진은 본능처럼 검을 세워 백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뼈와 살이 갈린 백호가 유진에게 쏟아졌다. 얼굴을 마주한 백호의 입은 벌려져 있지 않았다. 뜨끈한 피가 검을 타고 유진의 손으로 툭툭 흘렀다.
“대방!”
“숨을 끊고 가겠다! 먼저 찾아라!”
유진이 멀쩡한 걸 확인하자 추스른 자들이 밤 산을 내렸다. 백호는 움찔거리며 벗어나려 했으나 유진이 검을 돌려 내장을 헤집자 고통스럽게 침음을 흘리며 서서히 몸에 힘을 뺐다. 유진이 검을 단숨에 빼자 타닥거리는 반짝임이 떨어지는 피를 거슬러 백호에게 흘러 들어갔다. 유진이 빛을 본 기억을 되살리기도 전 백호의 무게는 가벼운 여인의 몸으로 순식간에 바뀌며 그를 덮었다.
“아…. 아……. 아아악!!!”
유진의 몸에 놓인 건 혜준이었다. 유진은 제 위에서 생이 끊어져 가는 여인의 얼굴을 움켜쥐듯 확인했다. 손에 묻은 피가 하얀 뺨에 덕지덕지 붙었다. 숨이 가빠졌다. 유진은 혜준을 그러안고 상체를 세웠다. 제품에서 혜준이 쿨럭이며 울혈을 토했다.
“유진…….”
“아니, 쉬……. 잠시만, 곧 그림자들이 돌아올 터이니 그대 말하지 말아.”
늘 영롱했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 간다. 혜준의 피가 너무 뜨겁고 많아 미쳐버릴 것 같았다. 평정을 가장하여 혜준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싶었는데, 외려 제 손의 피로 더럽혀졌다. 눈치채지 못한 새 맑은 물이 핏자국 틈새로 톡 떨어졌다. 혜준의 눈에 한껏 일그러진 처절한 저의 모습이 비쳤다.
“결국……. 그런데도 가여워……. 어찌하겠어…….”
혜준은 핏빛으로 물든 매듭 묶인 손을 올려 저를 부둥켜안은 유진의 손에 가벼이 올렸다. 유진은 그 손을 쥐고 제 입에 가져갔다. 온기를 불어넣듯 제발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손바닥에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멈출 길이 없었다.
“산군이지 않소. 이 산에는 아이들도 지키고 혼 길도 열어주는 산군이 있다 하였는데. 그것이 당신이지 않소.”
혜준은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유진은 혜준의 숨이 넘어가는 줄 알고 기겁하여 한껏 그녀에게로 몸을 숙였다 다시 뜨이는 눈을 지척에서 마주했다.
“업은……. 그대의 밤으로 대신 갚아주겠네.”
혜준의 손에 맞닿은 입술로 유진이 깊숙이 품어왔던 열감 하나가 쑤욱 빠져나갔다. 유진의 눈물이 뚝 멎었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헛한 느낌에 숨 쉬는 방법조차 잃어버렸다.
“살아…… 가…….”
순간 섬광이 혜준에게서 번뜩이더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눌리던 옷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피에 젖은 붉은 매듭만이 유진에 손에 아슬히 걸쳐져 있었다. 유진은 황망히 제가 안고 있었던 혜준을 불렀다. 혜준, 혜준, 혜준. 나지막이 부르는 이름엔 울음도 묻어있었다. 종래는 웃음이 나왔다. 유진은 제 가슴에 묻은 피를 움켜잡았다. 제 안에 빠져나간 그 열기의 빈자리가 간절한 슬픔으로 천천히 메워졌다. 숨 막히는 공허감은 숨을 죽이고픈 애통함으로 들어찼다.
내 애처로움과 서러움을 알아준 그대를 이제 어디서 볼 수 있나. 그대로 비쳤던 나는 어디로 가나. 나 따위 죽여 버리고 말지 어찌 송곳니를 세우지 않았나. 비겁하기 그지없는 내게 어찌 살아가라 하나. 나 따위가 살겠다고 버둥쳤던 것인데 왜 그대가 죽었나. 내가 죽였구나. 잡히지 않을 존재를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냈어. 이 손으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새벽이라 불리지만 별조차 보이지 않는 푸른 밤이 밝아왔다. 유진이 완전히 어둑함에 삼켜졌다.
* * *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유진은 단정히 검은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제 처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 도망친 아이들은 어떤 여인이 일러준 대로 짐승길로 산을 나와 곧장 관아로 가서 문을 두들겼다. 스물 남짓한 아이들이 울부짖자 문을 지키던 자들은 정신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제 손목에 묶인 검은 비단을 내보이며 다른 양반들한테 곱게 팔려야 하는 팔자라 했다면서 스스로를 인신매매의 증거로 내세웠다. 유진의 덜미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헌은 우연을 가장하여 색욕으로 유명한 양반들에게 아이들을 팔려 했었다는 애매한 증거를 흘렸다. 관아에서도 연고 없는 아이들이 점점 사라져 눈여겨보고 있었던지라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기울어진 기세를 똑똑히 확인하자 유진과 얽힌 모든 것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진은 이 거대한 조류 속에서 기이하리만큼 소리가 없었다. 아니, 소리를 낼 수 없는 자 같았다.
헌데, 이 조류는 뜻밖의 암초를 맞닥뜨렸다. 마리가 저를 산에서 구해 검은 비단으로 묶어준 후 쌀과 옷감을 주었다 증언한 것이다. 검은 비단을 증표로 비단 가게에 들락거린 명랑한 꼬마는 저잣거리에서도 유명인사인지라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의 집까지 짐을 지고 간 지게꾼도 힘을 보탰다. 상반되는 두 증거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수사는 유진의 수족들이 벌인 물밑 작업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유진은 그렇게 살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유진은 스스로 상단에서 물러났다. 유진에게 전부라 생각한 도방 자리와 그렇게 오르고자 했던 대방에 대한 욕망이 흩어졌다. 훗날을 기약한다는 약조조차 없어 유진에게 사활을 걸었던 이들은 혼돈에 빠졌고 유진은 그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떼어주었다. 뒷배를 잃은 이들의 앙심은 고작 떼어준 것만으로는 성치 않아 유진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앞다퉈 들이닥쳤다. 그날 아무도 죽지 않았던 그림자들은 길바닥의 돌만도 못한 인생에서 그나마 살만하게 해준 자에 대한 의리로 번번이 목숨을 건져줬다.
차를 받친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날 이후로 유진의 밤은 저문 적이 없었다. 그를 찾아오던 어머니를 마주할 문지방이 사라졌다. 혜준이 유진에게서 앗아간 것은 잠이었다. 제게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의 집합체가 깨어나는 때이자 안식의 소망을 품는 시간이었다. 유진의 명료한 정신은 이전에는 욕망을 구현하는 다리였으나 이제는 자신이 죽인 이들의 고통을 되새김질하는 칼로 변모했다.
유진의 거처는 눈이 내리는 소리마저 들릴 듯 했다. 허나 귓전에는 핏대 선 괴성이 끊임없이 울려 너무도 시끄러웠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날뛰는 데 진정시킬 힘이 없었다. 우연히 제가 받은 온기로 살아남았으나 고통스러웠다. 숨구멍이 매 순간 타들어 갔다.
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애석하게도 그의 육신은 휘청이지도 않았다. 단단히 세워진 몸으로 자신이 맬 수 있는 모든 장신구를 엄선하여 걸었다. 대방이 되면 신겠다 아끼던 검은 비단신도 꺼내 신었다.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번쩍였던 것들은 이제 그의 남루함을 가리키는 표징 같았다. 그 표징 중 눈에 띄는 건 핏자국으로 얼룩진 붉은 매듭 팔찌와 여즉 백호의 피가 묻어있던 이 나간 칼이었다.
유진의 다짐과 같던 검은 비단신은 유진을 그날 밤으로 데려갔다. 백설이 휘날리고, 눈은 포근히 쌓이고, 매어두었던 표식이 사라졌는데도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정명히 발자국을 남겼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용케 골짜기에 다다랐다. 멀찍이 혜준을 보냈던 그 자리에는 눈조차 피해 내리는 기묘한 호랑이가 유진을 기다리듯 앉아있었다.
“혜준……?”
-너로구나. 늦겨울 저물녘의 사내.
이명이 울리며 머릿속으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황색 털과 감색 털이 섞인 호랑이었다. 유진은 혜준이 아닌 것에 떨어져 내린 심정을 붙들어야 할지,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가 눈앞에 있다는 공포를 느껴야 할지, 말을 하는 짐승을 자연스레 여기는 자신을 이상히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호랑이는 잠잠히 말을 이었다.
-너를 기다렸지.
“나를 죽이러 왔소?”
-아니지, 그건 자네가 원하는 바가 아닌가?
혜준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그녀를 알고 있는 존재일 것이라.
“……산군이십니까?”
-누군가는 그렇게도 부르더군.
“혜준, 혜준을 아십니까?”
간절한 목소리였는데 호랑이는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며 유진에게 발톱을 드러냈다.
-감히 너 따위의 입에 담길 이름이 아니지. 네가 직접 심장을 찌르지 않았나?
호랑이의 울음에 온몸의 털이 쭈삣 섰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 제가 잡을 수 있는 끈은 그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온 힘을 다해 목에 힘을 주었다.
“산군도…… 죽습니까?”
-산군은 하늘과 땅을 이어 산의 맥을 뛰게 하는 자, 얽히고설킨 산속에서 혼들이 제 길을 찾아가도록 혼 길을 열어주는 인간이었던 자들이지.
유진은 제가 본 빛의 향연들이 혼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음을 짐작했다.
-시간을 멈추고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을 뿐 죽음 앞에는 공평히 서 있는 자들이지.
“그럼…….”
-그 아이는, 저를 살게 했으나 억울하게 죽어 혼 길을 잃은 아이들에게 제 것을 내어주고 천 개의 혼 길을 여는 업을 받았지. 딱 하나의 혼만을 남겨뒀는데 욕심에 눈이 먼 너 때문에 다시 태어날 길도 잃었구나.
강인한 목소리에는 잘 가다듬은 노기가 있었다. 유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한꺼번에 밀려들며 유진을 무저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혜준을 잃고, 혜준의 길도 잃게 했다. 숨길 수 없는 절망이 시시각각 유진에게 들러붙자 호랑이는 만족한 듯이 구기고 있던 콧잔등을 폈다.
-내가 여기 있고, 네가 잠을 잃은 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느냐.
유진은 더 이상 답할 힘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는 괘씸한 듯 꼬리를 탁탁 쳤지만, 거무죽죽한 그를 보면서 화를 달랬다.
-산군임을 잃으며, 업경을 속여 가며 인간인 너를 살린 것이니라.
어머니의 속삭임이 쟁쟁히 선명해졌다. 곧 속삭임은 혜준의 신음으로 바뀌었다. 살라는 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유언이었었나. 눈송이가 유진의 뺨에 흘렀다.
-네 업은 잃은 잠으로 가려졌고, 그 맑은 아이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와 혼조각들이 네게 묶여있어 차사들에게도 귀한 대접을 받겠어. 참으로 가진 것 많은 인생이구나.
호랑이는 콧김을 뿜고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비탄에 허우적거리다 급작스레 생긴 가망을 집었다.
“내게 혜준이 묶여있다 하였소?”
혜준의 이름에 반응한 호랑이가 귀만 쫑긋 움직였다.
-그래 그 버러지 같은 생에 고귀한 이가 잠들어있으니 인간으로 살아가거라.
“내게 묶여있는 혜준을 풀어줄 수도 있지 않겠소?”
-그 팔찌처럼 말이냐? 어리석은 자야. 네가 죽을 때 그 아이의 혼조각은 너의 혼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안고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제 혼보다 중요합니까.”
-조각만으로도 묶어둘 수 있는 것이라면 중하겠느냐.
“제가 여기서 죽으면 누가 내 혼을 인도합니까.”
-적어도 나는 아닐 게다.
호랑이는 더 물을 새도 없이 설산으로 훌쩍 들어갔다. 유진은 무릎을 꿇고 검집에서 피로 물든 손잡이를 천천히 잡아 단숨에 검을 꺼냈다. 혜준의 혼조각이 자신의 혼보다 중요치 않은 것을 잡고 있다면 중요한 것을 잡도록 유인하면 되지 않을까. 저 산군이 자신의 혼을 거두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 혼을 여기에 던져두면 그녀의 조각은 보다 더 중한 내 혼을 인도하러 오지 않을까. 길을 잃는 아이들을 두고 보지 않는 혜준이라면, 마지막에도 저를 가여워했던 이라면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내가 제물이 된다면, 혜준의 마지막 혼이 되어준다면 혜준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완벽한 계산이었다.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유진이 자신으로 살던 순간은 오직 혜준 앞에 있을 뿐이니 어떤 형태로든 혜준 앞에만 선다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혜준의 당부를 지키는 것이다. 유진은 검의 손잡이를 땅에 단단히 박고 칼끝을 제 앞으로 겨눴다. 무릎을 세우고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 혜준을 찔렀던 그 자리에, 심장이 뛰고 있을 곳에 칼날을 두었다. 이미 베인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소매와 매듭을 적셨다. 매듭을 얼룩지게 한 혜준의 피 위에 유진의 피가 스며들었다. 유진의 미소가 진해졌다.
“내가 무너지면 되지 않겠소.”
나를 불쌍히 여길 그대에게 기대어 죽어 가리라.
모든 생을 그대와 닿아 살아가리라.
* * *
눈물에 얼굴이 따가웠다. 머리에 안개라도 낀 듯 아득한 잔상만이 자욱했다. 붉은 팔찌, 까만 눈, 맑은 내음.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모든 핏줄은 펄떡거렸다. 잃은 것을 되찾은 기뻐하는 듯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혜준, 지난 밤 이성을 잃고 멱살을 잡았던 그 여자가 불현듯 생각났다. 붉은 색이 잘 어울리던 여자, 까만 눈으로 비창에 슬픔을 말하던 여자, 가까이 붙어 있을 때 끼치던 향. 온 감각이 또렷이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던 그 눈을 마주하고 싶었고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을 작은 여자의 단단함을 파고들어가고 싶어졌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다만, 그 눈이 자꾸 생각났다.
유진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긴요한 용건이라면 만들어낼 수도, 이미 쥐어진 것도 있지. 판돈이 클 때 작은 문제 신경 쓸 바가 아니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센 맥동이 유진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무너져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