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인드
written by. 티슈
바하마 지사장을 한유진이라 불렀던 순간 혜준은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를 보고 직감적으로 그인 줄 알았으면서, 할 말이 있어도 억눌러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마치 전화가 오길 기다렸던 것 마냥 단호히 그에게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 했다. 그 말이 그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갔을 지 심지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유진의 입장에선 너무도 명확했지만 혜준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나한테 오란 뜻으로 들렸을까? 내가 지금 한유진 더러 나한테 오라고 말한 건가? 난 지금 그 사람을 원하나? 복잡한 머릿속에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던 혜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어딜 가서든 잘 먹고 잘살 사람이라고 혼자서 되뇌며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혜준은 감정의 동요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며 요동치는 감정을 붙잡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야 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그 모든 일상 속에 ‘내 사람’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뼛속 깊이 사무쳐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과거에 매달려 있지 않기 위해 벽을 치고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의 감정이 더욱 두려웠다. 옆에 있어 주길 바랬는데 또 떠나버릴까 봐.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앞에서 총까지 맞았던 그이기에 혜준은 망설여졌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와 한참 동안 뜨거운 물 아래 샤워를 하고 못다 한 일을 정리한 혜준은 그제야 잠자리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말똥말똥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제 진짜 자야 할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가 긴장한 채 침대를 벗어나서 현관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수가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데도 문고리를 붙잡은 채 몸이 굳어버렸다.
날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이 문을 열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을 떨쳐내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인영이 혜준을 품에 가뒀다. 눈물을 흘렸던 건지 어깨에 닿는 그의 얼굴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으스러질 듯 자신을 안으며 온몸을 밀착해 오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리도록 시린 새벽을 달려와 서늘한 온도의 유진이었지만 자신을 안아주던 그 어떤 품보다 뜨거웠다. 진정으로 나를 원하는 사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 두렵지만 갖고 싶었던 ‘내 사람’. 그렇게 어지럽던 모든 생각들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온몸으로 사랑을 말하던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혜준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혜준의 머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품 안으로 집어넣어 잠을 청하려는 듯하다가도 조심스레 혜준을 자신에게서 떨어트려 그 얼굴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잠이 올 리 없는 밤, 혜준은 억지로 자신을 재우려는 유진을 뿌리치고 피아노 의자에 가 앉았다. 편안한 차림으로 하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얼빠진 표정이 그간의 모습들과 겹쳐 보이자 그런 상황에서도 감정에 솔직했던 그가 어이없어서 혜준은 웃음이 터졌다.
"그 날 벤치에서 나 놔두고 가버렸을 때, 기억나요?"
"그럼요, 기억나죠"
"왜 그렇게 가버렸어요? 난 분명히 말했었는데... 위로가 필요한 날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었는데요? 오늘 같은 위로였으면 당신 분명 나 밀어냈을 거잖아"
나라고 그때 혜준씨 데리고 우리 집에 안 가고 싶었겠냐고 툴툴 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나 피아노로 다가오는 유진에 장난기 어린 얼굴로 혜준이 대답했다.
"그럼 지금 해줘요, 그때 못한 위로"
* * *
갑자기 찾아왔던 유진은 그가 왔던 때처럼 갑자기 혜준을 떠났다. 기다리라는 쪽지만 남긴 채 다음 날 아침 사라진 그를 보지 못한 지 1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줄 알았던 마음이 실체 없이 커져만 가던 평범한 어느 날, 일하던 중 걸려온 마리의 전화에 혜준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혜준아…유진 한 아니 한유진 그 사람 총 맞아서 병원에 누워있었던 게 두 달 전이래, 너 알고 있었어? 나도 이걸 이제서야 알게 된 거라 이걸 지금 너한테 말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선배 말로는 한 달 전에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돈,”
“…누가..죽어..?”
차분하지 못한 말투로 횡설수설하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내뱉는 마리의 음성에 그가 죽었냐고 물어보는 혜준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핸드폰만 붙잡고 있던 혜준은 이내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곧바로 유진에게 전화를 건 혜준은 초조하게 울리던 신호음이 끊기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의 죽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전화하든 받지 않던 유진이었다.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오기 위해 그동안 벌여놨던 일을 정리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생각하며 버텨왔던 매일 밤이었는데 결국 전화는 걸어졌고 상대편에선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거기 혹시...한유진씨 핸드폰 아닌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묻는 혜준의 목소리에 상대방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고 혜준은 황망히 핸드폰을 바라봤다. 유진은 날 떠나지 않을 거라 되뇌이고 되뇌었던 나날들이 완전히 무색해질 만큼 하루아침에 사라진 희망에 혜준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의 머리에 겨눠졌을 총구의 섬찟함에 몸서리치고 총알이 관통했을 그의 몸을 고스란히 느끼며 고통 속에 잠에서 깨면 그저 태엽인형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 * *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헌이었다. 왜 처음부터 그녀에게 적극적이지 못했는지, 유진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말라가고 피폐해져 가는 혜준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저 위로였다. 제대로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혜준을 위해 묵묵히 곁을 지키던 이헌이었지만 너무나 순순히 옆을 내주는 혜준에 희망을 가졌던 것일 수도 있다. 혜준에게 병원을 소개해 주고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한 자신의 인맥에 처음으로 감사도 했다. 자신을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더 두꺼워진 그녀의 벽을 허물기 위해 이헌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 혜준과 함께 병원에 가려고 했고 스스로도 감당 못 할만큼이나 취해 유진이 보고 싶다고 자신의 앞에서 엉엉 우는 그녀를 위로하기도 했다.
한결같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이헌의 손길에 혜준도 조금씩 달라졌다. 일상에서 유진을 지우기 위해 여기저기 깨져있던 핸드폰을 바꿔버리고 다른 집으로 이사도 하며 한 겹씩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지금 이 순간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던 이헌의 노력은 그렇게 천천히 혜준을 바꿔놓았고 그녀와 함께 울고 웃던 1년이 지나가는 동안 하나가 아닌 둘로 기억되는 시간은 정직하게 쌓여만 갔다.
‘그냥 이게 맞았던 게 아닐까. 혜준이 옆에 내가 있는 것, 원래 그래야만 했던 게 아닐까.’
1년의 시간이 흐를 동안 항상 혜준의 곁에 있던 자신의 위치가 너무도 익숙해진 건지,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그 오랜 감정이 기어이 터져 나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이헌은 어떤 시작이었는지는 상관조차 없을 만큼 확실해진 자신의 마음을 담담히 고백했다. 그저 당연히 그녀의 옆엔 저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녀도 자신과 똑같이 느낄 것이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그의 결단을 끌어냈다. 혜준이 정말 이헌을 필요로 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너의 곁에 있겠다는 남자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헌은 어렴풋이 느껴지던, 느껴졌다 믿고 싶던 혜준의 사랑에 기대 계속해서 그 곁을 지켰다. 고모는 혜준의 그 지독한 악몽이 끝남과 동시에 누구나 탐낼만한 사윗감을 쟁취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서로의 부모님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친척들끼리의 간소한 상견례를 마친 후 자연스레, 둘은 결혼을 했다.
처음엔 껍데기뿐일 혜준일지라도 내 옆에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생각한 이헌이지만 그녀가 결혼을 승낙하고 나서부터는 그 생각을 잊은 듯이 보였다. 집안에 맞춰서, 직업에 어울리게 치러야 했던 첫 결혼과는 다른, 사랑으로 이어진 진짜 결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이헌은 놀이동산에 처음 가본 어린아이처럼 모든 걸 신기해했고 매사에 들떠있었다. 자신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유쾌하지 않았을 밑바닥의 감정까지 희생하던 이헌이 행복해하는 모습은 혜준 역시 웃게 했고 이헌이 살고 있는 집에 혜준이 들어가며 시작한 신혼 생활은 여느 부부의 신혼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혜준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놓은 눈앞의 사람을 따라가면 적어도 전처럼 어두워질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작한 결혼이었다.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 했던 것들이 그녀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데려다 놓은 듯했지만 짧은 신혼여행을 끝내고 이헌의 집에 도착한 순간 혜준은 느꼈다. 이헌이 원한 결혼이었고 그를 위한 것이라며 합리화했지만 자신이 아닌 그를 먼저 생각했다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했다.
노력으로 채울 수 있다 생각했던 간극을 더 멀어지게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또래가 아니어서 느껴지는 시차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온 방식,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까지 둘은 많은 측면에서 달랐다. 그들을 스쳐 간 시간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순간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혜준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배경이라 생각했던 부모님의 부재라는 상황에도 안락한 품을 떠나 보낸 이헌의 심정과 그 안락함을 느껴본 적도 없는 혜준의 심정은 같은 것일 수 없었다. 절박함이나 독기를 품을 수밖에 없던 혜준의 삶의 무게를 이헌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회색분자처럼 느꼈다. 자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흔히 원하는 출세에도 관심이 없으면서 그렇다고 혜준이 살고 있는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도,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했다.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생각해 보아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단 한 순간조차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목표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이는 혜준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혜준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이헌이 그 스스로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것에, 그가 자신을 위해 행하는 모든 것들에 점차 익숙해지는 듯했다. 유진에 대한 생각도 거의 나지 않았으며 좋은 집에서 좋은 것들만 보고 듣는 스스로의 삶에 의문을 던지지 않은 채 평온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혜준이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는 건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했던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게 된 건 그러한 일상에 젖어 드는 데 걸렸던 시간보다 훨씬 짧은 순간이었고 혜준은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난 생경한 감각이 날로 커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언제부터 당연시했던 걸까. 어질러져 있던 방을 정리하며 유심히 옷장을 들여다보던 혜준은 자신이 언제 이 많은 옷들을 샀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와 결혼한 후 자신이 직접 소비다운 소비를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한참을 되짚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걸 혜준의 의견에 따랐고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이헌이 알아서 챙겨줬었던 지난 몇 개월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걷잡을 수 없이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결핍을 모르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를 체화해 버린 것만 같은 자신이 놀랍고 또 놀라웠다. 막상 살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평화로워서 아마 알면서도 모른 체한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이헌의 집에 발을 내디딜 때부터 느껴지던 이물감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한 혜준은 그제야 그 감정을 제대로 마주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명확히 인지한 후로부턴 이헌의 앞에서 잘 웃지도 집에서 편히 있지도 못 했다.
이헌에게도 혜준을 위해 했던 그 모든 행동들에 그녀가 익숙해지는 걸 보는 것은 결코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혜준이 힘들어하는 틈을 파고들어 원래 그녀의 모습을 잃게 만든 것은 아닌가 자책도 했었지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해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점점 자신을 멀리하는 혜준에게 그렇게라도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 전처럼 웃음이 없어진 혜준을 보며, 사실 혜준은 유진을 잊게 해줄 사람으로 그저 항상 옆에 있던 자신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죽었다는데, 죽은 사람한테 질투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게 틈은 생기고 벌어졌다. 혜준은 언제서부터인가 밤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왔고 말없이 일만 했으며 깊은 얘기를 하려 하지도 않았다. 서로가 살아온 시간이 담고 있는 인생의 순간순간들은 셀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둘의 틈은 깊이 갈라진 채 굳어버렸다.
* * *
유진의 어린 시절, 뉴욕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온 건 그녀가 사용하던 세탁소의 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쯤, 그날따라 유독 기승을 부리던 덩치 큰 백인 아이들은 기어코 유진을 끄트머리로 몰아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날이었다. 집에 가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고 날카롭게 적막을 가르는 목소리는 유진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홀린 듯이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었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었다. 5층밖에 되지 않는 학교 건물 위에서 뛰어내릴까, 진짜 저질러버릴까 고민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은 성공하고 나서야 애써 웃으며 곱씹을 수 있는 기억이 되었다. 그날 그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마저도 나무에 걸려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마 그때의 자신은 온 정신을 놔버리고 싶었던 듯하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주위 사람이 행복했으리라 생각이 들던 순간 모든 걸 놔버렸는데, 눈을 뜨니 보이는 자신의 손에 겹쳐진 어머니의 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초에 정말 죽을 마음따윈 없었던 건지 죽지 않아 너무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깨어나자마자 마주했던 어머니의 표정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고 요양병원에 있는 지금에도 가끔 어머니는 유진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응급실 구석의 침대에 누워 거칠한 어머니의 손을 터질듯이 붙잡은 유진은 스스로에게 오늘 이 순간 다시 태어난 거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혜준 대신 총을 맞던 그때, 유진은 옥상에서 허공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딛던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찾았던 것 같다. 총에 맞아 희미해져 가는 정신에도 차마 손을 잡진 못할지언정 그 언저리라도 붙잡은 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없었지만 '이번엔 그때와 달라, 죽도록 살고 싶어'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눈이 감기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얼굴이 이혜준이란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 생의 문턱에서 두 번째로 돌아온 후, 어릴 때 누워있던 응급실 구석과는 다른 넓은 병실에 혼자 누운 유진은 아직 몽롱한 정신인 채였다.
혜준의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그날부터 그는 상상하곤 했다. 아버지의 허망한 눈동자를 수도 없이 지켜봐 왔을 지금의 그녀 앞에 같은 선택을 했던 그때의 내가 되어보고 싶다는 상상이었다. 어린 인생에 단 한 명이라도 혜준과 같았다면, 사라지지 않는 흉측한 흉터가 몸 곳곳에 남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무슨 일이 닥치든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도 세게 쥐고 있어서 손톱이 손에 박혀 살점이 뜯겨 나갈 지경이었다. 아프지 않을 수 없었고 고통스러웠지만 끝내 모른 체 했고 그래서 완전히 곪아버렸다. 아무도 이런 너덜너덜한 손을 잡아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스스로를 갉아먹을 만큼 고집스럽고 악착같이 집착하던 그를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혜준은 존재했고 그의 손을 잡아 줄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임을 알았다. 유진은 그저 그쪽으로 나아가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찾은 후엔 거칠 것이 없었다. 공항을 벗어나 새벽을 지나는 동안 머리 속엔 이혜준만이 존재했다.
그토록 두드리고 싶던 혜준의 문 앞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결국 당신에게 달려왔음을 알린 순간, 실로 오랜만에 그는 행복했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였을 때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다시 태어났다 생각하기로 한 그날부터 온통 적만이 가득했던 삶을 살며 그 안에 있던 유일한 그의 사람인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흉하게 곪아있는 손을 내밀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혜준의 곁에 머물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벌여놓은 일들은 여전히 그를 재촉했고 그는 한국에서 범죄자가 될 신분이었다. 하룻밤이었던 그 짧은 시간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유진은 느리고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대신 빠르고 눈에 띄게 돌아다녔다. 눈앞에 총구가 겨눠져도 두려워하지 않던 유진에겐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고 뉴욕에 있다던 그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은 전보다 더 집요하게 그를 찾아다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숨기며 다니든, 드러내 놓고 다니든 언젠가 한 번은 위험한 순간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던 유진은 좋지 않은 상황 속에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또 한 번의 총상을 입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뜨니 익숙한 배경이었다. 유진이 뉴욕에 막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찾아갔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는데 아직도 안 죽은 게 신기하다며 시덥잖은 농담을 해오는 그에게 유진은 간결하게 부탁했다.
"만약 내가 많이 다쳐서 오면 꼭 네가 수술해줘, 그리고 설령 내가 살더라도 그냥 죽었다고 말해"
뉴욕으로 넘어온 지 1년쯤 되던 날, 유진은 예견한 대로 결국 총에 쓰러졌고 기나긴 수술을 끝낸 후 자신을 빼돌린 친구의 집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으며 세간에선 죽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길 기다렸다가 남은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해결해야 할 모든 것들을 마무리하고 유진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 * *
이헌과의 사이가 멀어진 지 몇 달이 지난 후, 혜준은 술 한잔하자며 그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혜준이 자신보다 우선이었던 이헌은 그녀가 어떤 말을 꺼낼지 직감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 몇 분 후 혜준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말을 홀로 곱씹으며 이헌은 숨을 골랐다. 벌게진 눈가를 애써 숨긴 채 편안한 차림으로 혜준과 마주 앉은 이헌은 어째서인지 그제서야 마음속 응어리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사랑이었는지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줘버린 사람에 대한 의무감이었는지, 이헌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사랑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옆을 지켜주는 사람에 대한 익숙함이 더 컸다는 것을 이헌은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키던 이헌의 눈에 눈물이 고이던 순간, 혜준은 말했다. '우리 이제, 서로 놓아줄까요.'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격렬한 시간이었던 그간을 돌이키며 혜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보기에 건조한 삶을 살았어도 나름대로는 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늦은 첫사랑의 후폭풍이었을까.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분명 후회스러운 순간은 존재했다. 유진이 사라진 뒤 기계처럼 일만 하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고 나를 잃어버렸으며, 조건 없이 사랑해준 사람에게 진심을 담지 못했고 결국 상처를 줬다. 하지만 그 어떤 시간에 있는 이혜준이라도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원래의 '나'로 돌아와 20대 끝자락의 시간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며 매일매일 일상을 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간의 속도가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지나치게 빠르게 흐르다가 갑자기 느려졌던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안정된 마음이 그 속도를 체감케 했다.
고모네와는 여전히 투닥거리고 동료들과는 애증을 쌓아가며 평범한 겨울을 보내고 있던 혜준은 습관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수백 번도 더 연주해 본 비창이지만 질리지 않았다. 유난히 일이 많던 날, 저녁 늦게 퇴근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곡을 듣고 있던 혜준은 갑자기 끊겨버린 음악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는 화면을 보며 누구길래 이렇게 참을성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건지 확인하던 혜준은, 시간을 되돌린 듯한 그때의 화면을 다시 마주했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