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id Autumn Night's Dream
written by. 소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약 5분 전 혜준은 쫓겨나듯 거실로 나와야 했다. 오늘은 연휴 첫날 목요일이고, 별일이 없었다면 일찍이 조깅을 갔다 돌아온 유진이 갈아준 사과 당근 ―그러나 비율은 당근 사과에 더 가까운― 착즙주스를 반쯤 누운 채로 마신 후, 출근 준비 대신 씻고 나온 유진을 껴안고서 몇 시간쯤 더 잠들었어야 했다. 무릎 위를 웃도는 티셔츠만 덜렁 입은 채로 자다가 머리라도 다친 것 같은 제 연인이 걸어 잠근 방문 앞을 퉁퉁 부어서 서성이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유진. 왜 그래요. 문 좀 열어봐요.”
“Never come in. 절대, 저-얼대 들어오지 마요!”
“아니 얘기를 좀,”
안 돼요, 으허어엉. 성인 남성의 통곡소리에 혜준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유진 씨 울어요? 사달이 나도 아주 큰 사달이 난 게 분명했다. 바짝 굳어 방문에 손을 펼쳐 대고 있던 혜준은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뛰었다. 열쇠가, 열쇠가 어디에 있더라. 공구박스 옆쪽에 던져놨던가. 기억을 상기시키고는 까치발을 들어 신발장 위를 몇 번 더듬었다. 작은 박스 옆으로 손에 턱- 하고 걸리는 쇠뭉치를 집자마자 다시 급하게 뛰어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잠시 사이 쥐죽은 듯 고요해진 문 너머에 불안이 가중됐다. 혜준은 침을 한번 삼켰다가 손등으로 가볍게 노크하며, 나 들어가요.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해요.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여섯 개쯤 되는 것 중 안방 열쇠를 추려내어 꽂아 넣기 직전, 문이 배꼼 열렸다. 자신만큼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젖어있는 얼굴을 한 유진이 몸을 쑥 뒤로 빼고 얼굴만 내밀었다. 물기가 가시지 않아 축축한 눈가와 삐죽 나온 처진 입술에 혜준의 입이 절로 반쯤 벌어졌다. 헐벗은 상체를 이불로 돌돌 말고 자신을 경계하는 남자는 영락없는, 그러니까 혜준이 보기에 마치 서러움을 견디지 못한 어린 애와 다름없었다.
“저기요. 크흡, 누구... 누구세요?”
“아니 유진 씨 무슨,”
“그리고요, 흐엉. 이 사람은 누구예요?”
유진은 이불을 말아 쥐고 있던 한 손을 들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 사람, 아니 이 아저씨 누구냐구요. Who is he? Is it a dream?”
지금 뭐라는 거야. 혹시 나 뭐에 맞은 거 아닐까.
혜준은 후두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닌데 멀쩡한데.
“Say something! You’re Korean, right? 여기 대체 어디에요. 나 납치했어요? 흐윽, 아니면 다시 데려다 주세요. 우리 집은 브루클린이고요. 엄마가 세탁소를 하는데요. 주소는 315,”
브루클린, 엄마, 세탁소. 울먹이듯 뱉는 영어와 한국어가 혼용된 문장들을 멍하니 흘려듣던 혜준의 귀에 익숙한 단어들이 꽂혔다. 두 손을 들어 유진의 말을 잘라내고 한 발짝 멀어진 뒤 잠깐만. 브루클린이요? 하고 묻자 유진은 훌쩍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브루클린. 엄마가 걱정할 거예요. 브루클린이라니. 와튼을 다닐 때는 기숙사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곳을 떠난 지는 못해도 15년이었다.
장난을 이렇게 리얼하게 치는 게 어디 있냐. 몰래 어디 데뷔라도 하려는 거냐 핀잔을 주려는데 이불 사이로 들썩이는 남자의 흉부가 심상치 않았다. 불시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아이처럼 울면서 세탁소 일을 아주 오래전에 그만둔 엄마를 찾는 한유진. 설마. 에이. 혜준은 저의 상식에서 멀찍이 벗어난 추측이 빗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유진 씨 ...지금 몇 년도라고 생각해요?”
“1998. 흑, 왜 그런 걸 물어봐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대충 팔뚝으로 쓱쓱 비벼 닦아내던 유진이 코를 한번 킁- 먹고선 대답했다. 1998.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팔을 툭 떨군 혜준은, 아마도 본인이 만 열 살에서 열한 살쯤 됐다고 주장하는 서른여섯의 건장한 한유진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았다.
10일간의 휴가를 얻어낸 대가치고는 상당히 과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 * *
문에 붙어 울먹이는 유진을 달래서 간신히 끌어다 침대에 앉히고는 최대한 쉬운 단어를 이용해 설명했다. 여기는 대한민국 세종이라는 도시고 당신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서른여섯 한유진인데,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고. 유진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혜준을 바라보다 홀로 고민하는 것을 택했다.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혜준도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유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있는 혜준과 아주 멀찍이 떨어져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혜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 분 정도 눈을 감았다 떴지만, 한 시간 같은 일 분이 지나가도 바뀐 것은 없었다. 혜준은 저의 눈치를 흘긋흘긋 살피는 유진의 눈을 마주하고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순서대로 정리했다.
1. 오늘따라 기상 시간이 늦는 유진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2. 눈을 떴기에 잘 잤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3. 비몽사몽 하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겁하고 멀어졌다.
4. 놀라서 다가갔는데 오지 말라며 뒷걸음질쳤다.
5. 괜찮으냐 묻자마자 방에서 쫓겨났다.
6. 비명을 지르다가 울었다.
7. 나를 모른다.
8. 본인도 모른다.
9. 브루클린에 사는 열 살이란다.
10. 말도 안 돼.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에 결함이 많은 일련의 흐름을 되짚다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부터 머리카락까지 쓸어 넘겼다. 한유진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휴일 아침의 말간 혜준과 거리를 두는, 한유진의 말을 빌리자면 ‘미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다.
유진은 여전히 이불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따라서 멋쩍어진 혜준은 슬그머니 베개로 훤히 드러난 다리를 가렸다. 새벽까지만 해도 틈 없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혜준은 자다 깨 마주한 유진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던 터라,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당기면 당기는 족족 모른 척 끌려가 줄 용의도 있었다.
밤새 아래로 굴러떨어졌을까.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았던 것 같기도 했지. 아니라면 어떻게 갑자기.
기실 유진은 바빴다. 혜준 역시 시간을 허투루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진은 근래 24시간을 48시간으로 나눠 쪼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으니까. 분명 저보다 늦게 잠들었을 텐데, 일어나보면 잠든 자신의 옆에 구부정한 모양으로 앉아 태블릿 혹은 두께가 꽤 되는 서류 더미를 살피는 날이 잦았다. 피곤한 기색도 없었고, 무엇보다 본디 체력이 괜찮은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던 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손마디 살을 자국이 날 정도로 깨물며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우는 사이, 유진은 거칠해진 제 턱과 볼의 촉감을 두 손으로 더듬어가며 느끼다 비장한 얼굴로 침묵을 깼다.
“이 아저씨가... 나라는 거예요?”
그렇죠. 그 ‘나’가 누군지는 몰라도. 혜준이 긍정의 뜻을 보이고 짧은 시간 동안 퀭해진 것 같은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병원을 가볼지 아니면 좀 더 대화를 해서 단서를 얻어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혜준의 마음을 쥐뿔도 모르는 유진은 또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가 악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누나는 누군데요?”
“...미치겠네.”
혜준은 울듯 웃었다. 나는 유진 씨의, 친구죠. 좀 많이 가까운 친구. 얼마나 가까운지 오늘도 한 이불에서 일어난 걸 보지 않았냐는 뒷말은 자체 검열했다.
“그냥 친구예요?”
“유진 씨를 좋아하는 친구?”
“Like girl friend?”
“그런 셈이죠.”
입술을 매만지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해도 이리저리 살핀 남자의 얼굴엔 제 모습이 몇 군데 남아 있었고, 혜준의 나긋한 목소리로 미뤄보아 이 상황이 납치, 감금, 실험 따위의 키워드가 아닌 것도 확실했다.
좀 생생한 꿈이라는 결론에 공포가 저만치 가시자, 타깃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본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여자친구’라는 혜준. 오감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으니, 설령 제가 만들어 낸 꿈속의 환상일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이에 대해 생경한 호기심과 어딘지 모를 쑥스러움은 당연히 일수밖에 없었다.
...이 아저씨 성공했네. 별안간 귀가 붉어진 유진이 중얼거렸다. 안 그렇게 생겨서 평소에도 혜준 앞에서 귀고 얼굴이고 붉히는 일이 잦은 남자였다.
성공이라. 혜준은 그 뜻을 가늠해보려 했으나 끝내 명쾌한 답은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 옆을 차지한 게 내 인생 최고 아웃풋이죠’ 라며 능청을 떨던 서른여섯 한유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직 제 몸과 동기화가 덜 되어 자신을 ‘아저씨’라고 칭하며 분리하려고 했지만, 혜준은 당장 위안거리가 필요했으므로 그 부분은 모른 척 덮어두었다.
뭐가 어찌 됐든 얘도 한유진은 한유진이라는 거잖아.
“...일단 우리 뭘 좀 먹어볼까 봐요. 배가 차면 생각날 수도 있으니까, 먹고 다시 얘기해요.”
마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혜준은 밥 핑계를 대며 침대 프레임 아래 나뒹굴고 있는 잠옷 바지를 슬쩍 집었다. 입고 나가야 할지 나가서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 새에 유진이 이전보다 명랑해진 투로 물었다.
“있잖아요. 이름이 뭐예요?”
“...혜준. 이혜준이에요.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학교에 June이라는 애가 있기는, 아니 이게 아니라. ...저 누나, 그냥 유진이라고 하면 안 돼요?”
눈을 끔뻑거리던 혜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실소했다. 웃을 상황이 아닌 건 알지만 어린 티가 나는 유진이 어이없으면서도 조금, 아니 사실 많이 귀여웠다. 혜준은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아니지. 그래 ...유진아.
혜준이 붕붕 뜬 유진의 머리카락을 꾹 눌러주었다. 피하지 않고 손길을 받는 모양이 퍽 싫지 않은 눈치였다.
* * *
우두커니 앉아 있는 유진의 앞으로 스팸과 케첩이 뿌려진 엉성한 스크램블 에그, 감자조림, 그 외 곁 반찬 몇 가지가 올라왔다. 유진은 편식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저학년 맞춤으로도 꽤 괜찮은 차림이지 싶었다.
다행히 낯설어하는 기미 없이 수저를 들었다. 잘 먹는 모습이 왠지 기특해, 혜준은 제 끼니 챙길 생각도 않고 유진의 앞으로 손이 자주 가는 것 같은 반찬 그릇을 밀어주기 바빴다. 젓가락을 들어 잘 구워진 스팸을 밥 위에 얹어주니, 유진은 혜준의 얼굴을 흘긋 보고는 밥 한 숟가락에 얹어준 것을 올려 야무지게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릇이 거의 비워져 갈 때쯤 유진은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혜준의 눈치를 살폈다.
“누나는 왜 안 먹어요?”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며 대강 둘러대자, 유진은 혜준의 밥 위에 똑같이 스팸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엄마가 아침 잘 먹어야 하루를 잘 보낸다고 했어요.”
아침을 못 먹여서 안달이었던 게 어머니 때문이었군. 밥보다 잠이 우선순위였던 혜준에게 시리얼이라도 어떻게든 먹여보려다 실패한 유진이 절충안으로 내놓은 게 갖가지 종류의 채소와 과일을 혼합한 착즙주스였다. 냄새는 평생 적응이 불가할 것 같았지만, 만드는 정성을 생각해 받아들면 없는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행복해하기에 군말하지 않고 컵을 비우곤 했었다.
혜준은 습관처럼 마셨던 음료의 부재에 오리무중인 서른여섯 한유진의 행방을 다시 상기했다.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됐을까. 인과관계를 헤아려보려 노력했지만 죄다 헛수고였다. 결국, 눈앞에서 흔들리는 유진의 큼지막한 손바닥을 보며 상념에서 빠져나오면서도 떨떠름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 *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어?”
유진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했지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혜준이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팔을 가볍게 쓸었다. 유진은 눈꼬리를 내렸다. 여전히 조금 망설이는 투였다.
“어제 자기 전에 빨리 크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I know that’s nonsense. 그렇지만 진짜인데... 근데, 이거 꿈이 아니에요?”
“아닌 것 같은데.”
“어, 하지 마요. 아파요.”
혜준은 제 팔을 힘주어 꼬집었다. 놀란 유진이 피부 위로 남은 미미한 붉은 자국에 재빨리 제 손을 덮었다. 하는 행동은 전이랑 별 다르지도 않아서 괜히 심란해진 혜준은 유진에게 네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병원에 가야할 것 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남까지의 과정도 보통 예사롭지는 않았으니, 이번 일 역시 좀 특이하게 지나가는 이벤트가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 크고 싶었는데?”
“...어리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혜준은 두 달 전 보스턴 교외의 깔끔한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긴 그의 어머니를 찾아뵈었던 날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시간이 어느 시점에 멈춰 있다는 것을 전보다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혜준은 그가 부채감을 물질로 해결할 수 없음을 비로소 인정한 후부터, 어린 날 경험했던 무력감에 이따금 빠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능숙하게 말로 다독이는 법은 몰라 그런 날은 무작정 팔을 벌렸다. 품을 내어주다 보면, 서로가 없었을 때에 어떻게 이런 날들을 견뎠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침울해진 유진을 보던 혜준은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덥석 잡고 일어섰다. 엉거주춤 함께 일어선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이 추우려나... 혹시 모르니까 따뜻하게 입자.”
괜히 사람 마음 아프게. 서른여섯일 때랑 표정이 똑같으면 어떡해.
여전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혜준은 브루클린에 살던 한유진에게도 이혜준이 필요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 * *
즐거워할 만한 장소를 찾아 밖으로 나가보고자 했지만, 목적지를 딱히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근교에 좋다는 곳은 다 찾아보며 고민을 하던 중 혜준은 문득 서울 거처를 정리하기 전, 유진과 석촌 호수를 거닐었던 때를 떠올렸다.
무더위가 가시기 시작한 초가을이었다. 아홉 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도 불야성처럼 조명이 번뜩이는 테마파크 옆을 지나면서 제법 찬 공기에 한기가 들어 팔을 쓸자, 유진은 챙겨온 제 겉옷을 걸쳐주고는 혜준의 어깨에 손을 둘러 제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마찬가지로 유진의 허리를 감싼 혜준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설핏 웃었다.
“늦게까지 열심히들 노네요.”
“다음에 갈까요? 나 저런 데 안 가봤거든요. 실은 가자고 해도 안 갔어요. 못 갔다고 하는 게 맞나.”
“한유진 씨 의외로 나랑 처음 하는 게 생각보다 많겠네.”
빙 돌려 가주겠다는 뜻을 밝히자 감격에 젖어 덩치를 생각하지 않고 치대려 하기에 걸음을 빨리했지만, 예사로 한 말은 아니었다. 가보지 못한 곳, 해보지 못한 일의 첫걸음을 공유하는 포만감은 유진과 함께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 중 하나였으므로, 혜준은 반나절 넘게 바람을 맞아 정신이 없고 다리가 저렸지만 감수한 가치가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이후에 돌아온 한유진이 이날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 *
“젖었어요.”
코트를 툭툭 털어주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젖은 앞머리에 가져다 대자 유진이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물기를 대강 말려준 혜준은 조금 전 인화한 사진을 내밀었다. 후룸라이드의 내리막에서 찍힌 즉석 사진에는 잔뜩 몸을 옹송그린 유진과 혜준이 차례로 찍혀있었다. 고개를 너무 숙인 나머지 둘 다 이마밖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혜준은 만족스러웠다.
“얼굴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찍혔으면 더 창피했을걸? 나는 마음에 들어.”
계속해서 키득대는 혜준의 모습에 유진도 결국 흐흐 웃고 말았다. 날이 추워져 더 오래 있는 것은 무리겠다 싶어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탄 기구였다. 보트가 하강하는 중간쯤이 찍힌 사진은 퀼리티에 비해 턱없이 비싸기는 해도 두고두고 꺼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었다.
유진은 상기된 얼굴로 바이킹과 롤러코스터를 각각 세 번씩 탔다. 처음 줄을 서면서 지레 겁을 먹었기에 달래준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두 번은 같이 탔지만 세 번은 무리다 싶어, 혜준은 벤치에 앉아 몇 분을 홀로 기다렸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그를 보며, 하여간 뭘 하든 중간은 없는 성정은 불변이구나 싶어 혜준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웬만큼 탈 수 있는 건 죄다 섭렵한 유진은 VR체험관과 4D영상관에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여기가 미래가 맞긴 맞다며 들떴다. 그에 혜준은 어릴 적 제가 상상한 지금은 어땠는지 더듬어보다가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아마 시간이 지나 맞게 될 어떤 날들에 불과했다고 여겼던 것 같았다.
혜준은 이전보다 유한 유진의 얼굴과, 자신과 비슷해진 그의 체취를 이질감없이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문득 당황스러워졌다. 예상치도 못한 이의 곁에서 막연했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동안은 당연한 듯 별다른 자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니. 불과 몇 년 전까지 지구 반대편에서 얼굴과 이름조차 몰랐던 판이한 남자와 일상을 공유하고, 대체할 수 없는 마음을 주고받고 있었음이 유진의 말처럼 꿈같아지는 순간이었다.
* * *
세종에 도착해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유진은 뜬금없이 물었다.
“...나랑 지내는 거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의 ‘나’요.”
하루를 보내면서 그는 미래의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보다도, 어른인 자신이 혜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짧은 순간 누군가를 온전히 마음에 품었음을 아는 일은 브루클린의 어린 소년에게 쉽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먼 훗날 혜준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설렘 뒤로 섬찟 불안이 따랐다. 유진을 내리누르던 죄책감 아래로 파생된 두려움이 대상만을 달리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게 하지는 않았나요. 나 때문에 혹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나요.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덜어내고 물었지만, 긴장으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야 했다.
혜준은 두 시간 조금 넘게 달리는 동안, 혼잡한 도로의 창밖만 내리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던 유진이 영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혹여나 유진 한으로 살았을 적의 일이나 어머니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답을 내어주는 게 최선일지 고민하느라 식은땀이 절로 났다. 젖은 핸들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손을 문댔던 통에, 위쪽이 살짝 구깃구깃해진 면바지만큼이나 혜준의 머릿속도 어지러웠던지라 이런 질문엔 외려 마음이 놓였다. 혜준은 자신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답을 기다리는 유진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두 사람 다 빙빙 돌리는 대화 방식을 선호하진 않았어도, 때로 유진은 부러 원하는 바를 불분명하거나 몹시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포장해 놓고 혜준이 숨은 의미를 찾아주기를 기다렸다. 별일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어렵게 말할 필요 없지 않느냐 물으면, 유진은 ‘이렇게 엉망으로 말해도 혜준 씨가 알아주는 게 좋아서요.’ 단 한 마디로 뾰족해진 혜준을 허물었다. 평소 같았다면 ‘애도 아니고...’ 하고 가벼운 핀잔을 주었을 테지만, 혜준은 오늘만큼은 군말 않기로 하고 유진을 한번,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한번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금처럼 옆에서 같이 기다리면서 지내는 중이거든. 음... 괜찮다는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네.”
“기다려요?”
“응. 좋은 일이 올 것 같으면 행복하게, 혹시 안 좋은 일 있으면 무사히 지나갈 때까지.”
“...나 때문에 안 좋은 일만 계속 있으면요.”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짧은 시간 머물다 지나가. 그런 것보다 그 순간에 옆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거고. 그래서 나는 너한테 오랫동안 같이 기다려보자고 했어.”
“왜 나였는데요?”
“그건,”
가벼운 알림 음과 함께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선 혜준을 보며 유진은 여전히 문 바깥에 서 있었다. 혜준이 돌아서서 유진을 마주 봤다.
“아마 네가 약속을 잘 지켜서 나한테 왔으니까?”
약속보다는 혼자만의 다짐에 가까웠던 발신자 제한 전화를 믿었다고 하진 않았지만, 혜준은 여전히 바깥에 서 있는 유진을 위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 *
유진은 씻고 나온 사이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혜준을 조심히 눕혀주고는 무릎을 모아 앉았다. 곤히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지저분한 브루클린의 뒷골목이나 어두컴컴한 세탁소를 가득 메워, 마치 몸에도 밴 듯한 유기 용매의 냄새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도 같았다.
“있잖아요. 아버지가 집에 오면 엄마랑 나는 세탁소 쪽방에서 잠을 자거든요. 실은 어제도 그랬어요. 그러면 엄마는 한국에서 살았던 동네는 어땠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말해주는데, 나는 나 때문에 엄마가 한국에 못 가는 것 같아서 화가 났거든요. 나만 아니었으면 엄마가 좀 덜 힘들었지 않았을까.”
“... ...”
“실은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게 아니라,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왜 여기로 왔는지 모르겠어요...”
중얼거림을 가만 듣던 혜준이 나른하게 눈을 뜨고 모로 돌아누웠다. 유진의 손을 끌어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안 잤어요? 당황한 그에게, 혜준은 어느 날 팩소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던 벤치에서처럼, 그때보다는 다정하고 세심한 말을 골라 건넸다.
“...내가 너희 어머님을 뵈러 가면, 우리 유진이가 어렸을 때 깎아놓은 밤 마냥 예뻤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엄마를 많이 도와줬는데 못 해준 게 많아서 늘 미안했다고 그러셨어. 해준 것도 없는데 혼자서 뭐든 잘해서 기특하셨다고. 너 없었으면 그 긴 날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으셨대.”
네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어머니도 너를 사랑하신다는 거야.
유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혜준의 어깨쯤에 얼굴을 묻어와 셔츠가 금세 축축해졌다. 팔을 뻗어 등을 쓸어주니 한참 숨을 골랐다. 아침부터 생각했는데, 원래 눈물이 많았구나. 고개를 간신히 들게 해 속눈썹에 붙은 방울진 눈물을 닦아주며 혜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작은 손은 금세 유진의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졌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말고, 어머니 곁에 있어. 사라지면 나중에 나하고도 못 보잖아.”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내가 만나러 갈게요.”
“그럼. 헤맬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 ...”
“할 수 있어. 너는 네가 한 말... 예전에도... 잘 지켰다고 했잖아.”
의식이 둔해져 갔다. 이어지지 못한 말들이 드문드문 끊겼다. 어느새 잠들어 몸을 웅크린 혜준에게 담요를 끌어 덮어 준 유진은 팔을 소파에 걸치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댔다.
알았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도 잘 도와줄게요. 꼭... 갈 테니까, 우리 나중에 봐요.
바깥으로 삐져나온 혜준의 손끝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 시곗바늘은 자정을 막 넘어가는 중이었다.
* * *
등 뒤로 묵직한 무언가가 달라붙어 오고 있었다. 놀란 혜준이 몸을 휙 틀었다. 안으려 팔을 뻗고 있던 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소파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 침대로 옮겼는지 물으려는 차에 그는 혜준의 헝클어진 옆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귀에 꽂아주고는 귓가부터 뺨을 여상히 매만졌다.
“나 때문에 깼어요?”
“...유진아.”
“...응?”
다소 당황스러운 호칭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유진의 광대가 치솟았다. 혜준을 꽉 끌어안은 그는 이마에 코에 입술에 한 번씩 입술을 몇 번씩 가져다 댄 후에야 실실 웃으며 떨어졌다.
“이제 나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거예요? 너무 좋아요. 나도 앞으로 혜준아- 할래.”
“돌아왔어? 한유진 지금 서른여섯이에요?”
“...혜준, 혹시 어디 아파요? 병원 갈까?”
“오늘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에요. 빨리.”
“2022년 10월 28일이에요. 자기, 정말 괜찮아요?”
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열을 재려 손을 올렸을 때 혜준이 유진의 가슴팍에 파고들어 이마를 붙였다.
“...맞네. 다시 나이 들었어.”
“이거 뭐예요? 나 지금 좋아해야 하는 건가?”
“유진이가 약속 잘 지켰네요. 한유진 씨 고마워해야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나 말고 다른 유진이가 있어요?”
“있었죠. 기억 안 나나 보네.”
“네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불 보듯 뻔한 남자를 다시 힘주어 끌어안고 엉덩이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어요. 잘 왔어요. 늦었지만 칭찬해줄게요.”
“Is it a kind of riddle? 알 수가 없네.”
“있죠. 오늘은 사과만 갈아줄래요? 당근은 싫은데.”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혜준의 등을 쓸어내렸다.
“혜준을 사랑하다 보면 가끔 억울할 때가 있어요.”
“갈아 올 동안 억울함 풀어줄 방법 찾아볼게요.”
“말 안 해줄 거라는 거죠?”
“잘 아네요. 기억 못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진짜 이럴 거예요?”
“네. 이럴 겁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유진이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알았어요. 대신 준다는 거 확실하게 받을 거예요.
제 볼을 한번 깨물고선 투덜대며 방을 나서는 너른 뒷모습을 보며 웃던 혜준이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가 양옆으로 상체를 천천히 굽혔다.
마주한 애인의 얼굴은 오늘 역시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 전에 미리 준비운동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