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scene
written by. 머겜러1인
Scene #1. [기재부, 허 부총리실]
허재는 혜준을 바라보았다.
"그 친구, 자네와 개인적인 관계를 원하나?"
감정없는 표정에 무던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허재의 여상한 눈만은 혜준의 짙고 검은 머리칼에서부터 말간 얼굴의 측면을 한순간 빠르게 훑었다.
무엇인가를 재는 듯한 사내의 눈길. 그것을 발견한 이헌의 가슴에 순간 불길이 일었다. 이헌은 허재와 같은 성(姓)을 가진 사내였기에.
혜준은 흑과 백의 대비가 명백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이헌과 마찬가지로 허재 또한, 세상의 많은 사내 중 몇몇은 분명히 그 '명백한 대비'에 매료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
이혜준이 총명하고 반듯한 기재부의 일원,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린 청년인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것이 자명했다.
그것과는 별개의 -나이와 사회적인 직급 등의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만 남았을 때, 허재가 이혜준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순식간에 알아챈 이헌은 제 속을 뚫고 나오려는 불덩어리를 애써 억누르며 허재를 만류했다.
"...부총리님. 그건 개인적인,"
혜준은 이헌이 말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입을 열어 고요히 말한다.
"전혀 아닙니다."
"..."
혜준은 순식간에 불길을 향해 찬물을 끼얹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혜준은 이헌을 진정시켰다. 물론 이 '진정'이라는 감정은 허재와는 달리 아직 윤리관이 반듯한 제 부하직원을 향한, 미쁨에 준하는 감정이어야 할 것이다. 안도감이 아니라.
"됐어, 그럼. 토빈세 TF팀에 들어가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유진 한이 이 사무관을 찾아야 할 그 '긴요한 용건'. 우리가 마련해 주자는 거야."
이헌은 기어이 제 상사를 향해 큰소리를 냈다.
"부총리님!"
"...하겠습니다."
"이 사무관!!"
애써 눌러내렸던 홧홧한 불길이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솟아올랐다. 혜준은 더 이상 말을 뱉지 말 것을 경고하듯 엄한 목소리를 한 제 앞의 사내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허재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유진 한. 제가 접촉해서 알아내겠습니다."
Scene #2. [기재부, 국장실]
비서는 혜준의 앞으로 뜨거운 차가 든 잔을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혜준의 인사에 비서는 고개를 살짝 숙여 답한 후 나갔다. 비서가 문을 닫는 소리를 끝으로 국장실엔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이헌은 어쩐지 불만이 가득한 듯한 혜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몇 번 눈을 꿈뻑이다 혜준을 부른다.
"이혜준 사무관."
"..."
이헌이 금융위원회에서 기획재정부로 온 지도 몇개월이 흘렀다. 이헌은 형제하나 없는 외동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혜준을 자신에게 없던 누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대했다. 그래야만 했다.
첫 회식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헌은 이상하게 제 앞의 햇병아리 사무관과 얽혀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햇병아리' 사무관은 이헌의 속 한구석에서 어느새 '이혜준'이라는 이름을 갖고 제 정체성을 뚜렷히 하려하고 있었기에.
"..."
"..."
이헌은, 그것이 요즘 세대에서는 보지 못했던 굳건함이나 신념을 가진 이를 향한 윗 세대로서의 뿌듯함인지, 아니면 혹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려 하는 남성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지는 구별해 낼 것도 없이 그대로 묻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부 총리께서, 어떤 이유로 이 사무관을 팀에 합류시키라고 하셨든, 그 결정은 내가 합니다."
"..."
"결정하기 전에,"
이헌은 혜준과 눈을 맞추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사무관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야겠어요."
"..."
"부 총리께서 왜 이 사무관을 팀에 들이라고 했을까요?"
"..."
이헌은 다음 말을 뱉기 전 목을 한번 꿀렁였다. 뚜렷히 오른 남자의 목젖이 곧은 목을 유영하는 것을 혜준 또한 잠깐 바라보았다.
"이 사무관의 '쓰임새'에 주목을 하신 겁니다."
"...'쓰임새'요?"
혜준의 짙은 눈썹 사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헌은 역시나 제 단어 선택이 조금은 지나쳤음을 시인하며- 속으로는 '아차'했지만, 이제와서 그것을 대체할 표현을 찾을 수는 없었기에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 사무관에 대한 유진 한의 관심. 유진 한의 생각을 읽어서 우리에게 알려줄 수도 있겠다. 뭐, 그런 계산을 하신 것 같은데. 나는 내 부하 직원이 그런식으로 '이용'되는 거...용납 못 합니다."
혜준의 미간이 또 한번 찌푸려졌다. 이헌은 덤덤하고 우직한 제 성정과 어울리지 않게 드디어 혜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다소 후회하는 모양새였다. '이용'이라는 단어는 쓰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 따위가 잠깐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국장실로 호출 될 적부터 뿔이 난 모양새로 꾹꾹 눌러참고 있던 혜준이, 드디어 제 단정한 목소리에 분노어린 감정을 섞어 보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혜준의 말에 이헌이 무엇인가를 답하기도 전 혜준이 말을 이었다.
"이용 당해도 됩니다."
[Behind the scene #1.]
"뭐?"
"..."
네가 방금 뱉은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는 표정이었다. 혜준은 제 앞에 앉은, 반듯한 이마에 정갈한 이목구비를 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부 총리께서 제 '쓰임새'에 주목하셨다고 했죠."
"..."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혜준."
"그렇게까지 빙빙 돌려서 말씀 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애도 아니구요-...하고 중얼거리는 혜준의 말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분노와 황당함이 더해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완전히 잠식당한 채 이헌은 어느새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혜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어쩐지 연륜이 가득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이었다. 혜준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제가 어디까지 지껄이는지 잘 들어보세요. 국장님.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부 총리께서는 유진 한이 저에게 '화대'로서 각종 정보를 넘겨주기를 원하시는 거 아닌가요? 저는 상관 없-"
...이헌은 넓다란 손바닥으로 제 앞에 높인 청록색 찻잔을 그대로 밀어 엎어버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충돌한 찻잔의 파편이 물을 머금어 반짝였다.
"..."
혜준은 굳어버렸다.
차마 이헌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채 조각난 파편들만을 바라보았다.
"닥쳐요."
제 옷깃하나 스치기도 조심스러워하며 거리를 두고 걷던 우직한 상사는 그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
"..."
본래 혜준의 성정이라면, 제 앞의 상사가 날뛰던지 말던지 유유히 말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헌은 제 상사가 아니라, 흡사 자신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던 유진 한과 결이 같은 모습을 한 사내였다.
흉포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남자의 넓다란 가슴 위로 셔츠가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오른듯 했다. 혜준은 그저 검붉은 색의 매끈한 넥타이가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것만 황망히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이헌은 거친 숨 사이로 느리게 말을 뱉는다.
"이혜준."
"..."
"창피한 줄 알아."
이헌의 이마 위엔 굵은 핏줄이 불뚝, 올라있었다.
순간 혜준은 눈물이 그렁해진 채 그대로 국장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Scene #3. [TF합숙, 밤 산책]
한적한 도로를 따라 선선한 밤의 바람이 혜준과 이헌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있었다. 살근살근 두피를 훑고 사라지는 차가운 공기에도 두 사람은 그저 천천히,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다소 긴장한 상태로 바닥을 보며 걷던 혜준의 귀로 남자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 돈 떨어졌어요?"
"...네?"
"바닥에...하도 고개를 숙이고 걷길래."
혜준은 고개를 들어 이헌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마주친 혜준의 동그란 눈에 이헌은 머쓱해져 고개를 돌려버린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씨익 웃는 이헌의 수더분한 행동에 어울리지 않게,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피부는 결이 좋게 반짝이고만 있었다. 안 웃네?...하는 이헌의 중얼거림에도 혜준은 그저 이헌의 단단하고 반듯한 이마에서 극적으로 떨어지는 높다란 콧대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솔직히,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럴 때마다 나이 차이 많이 느껴진다고 대꾸하면 무례한건가, 아니면 재미있다고 받아넘기려나...하고 각을 재던 혜준의 상념을 뚫으며 이헌은 또 말을 걸었다.
![32. [이헌혜준] behind the scene_머겜러1인(photo)](https://static.wixstatic.com/media/9e4679_af64b6da75e04813b5d810221ecee548~mv2.jpg/v1/fill/w_600,h_273,al_c,q_80,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32_%20%5B%EC%9D%B4%ED%97%8C%ED%98%9C%EC%A4%80%5D%20behind%20the%20scene_%EB%A8%B8%EA%B2%9C%EB%9F%AC1%EC%9D%B8(photo).jpg)
"사무실에서도 그래요."
"..."
"보면 항상 이렇게 구부정~하게 고개 숙이고 있고."
"..."
"척추를 딱 이렇게, 똑바로 세우고!"
이헌은 시범을 보이듯 제 곧은 등을 더 곧게 세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걸어야지.' 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제 누이를 나무라듯 중얼거린다. 혜준은 그만 조용히 웃어버렸다. 이헌의 고개는 어느새 계속 걷기만 하는 혜준을 향해 있었다.
도로 옆을 수놓은 노란 등에 반사된 말간 피부를 훑던 이헌이 그 자상하고 담담한 말투로 혜준에게 물었다.
"그 때는 왜 그랬어요?"
[Behind the scene #2.]
마치, 버릇 없는 아이를 훈육하는 경력이 풍부한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다만, 혜준은 아이가 아닌 성인이었기에, 이헌은 '우리 혜준이 왜 그랬지?'하고 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혜준은 제 쓸데없는 망상에 피식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이헌은 웃음을 참으려 지어보이는 혜준의 울적한 표정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화내는 거 아니에요."
"..."
"이혜준 사무관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헌은 걸음을 멈추었다. 혜준은 차마 이헌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느리게 제 발걸음을 멈춘다. 몇 발자국 앞서 멈춘 혜준 때문에 이헌과 혜준은 몇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이 사무관은 대한민국의 능력있는 관료에요."
"..."
"그거면 돼요."
'다른 걸'로 이 사무관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 없어요- ...단언하듯 혜준을 향해 나직하게 건넨 남자의 말이 고요한 밤 공기를 타고 흘러왔다.
국장실을 박차고 나간 이후 이헌은 따로 혜준을 경질하지 않았다. 그대로 TF팀에 혜준을 넣도록 한 이헌은 그저,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로 가장해서 유진 한을 접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을 뿐이었다.
"..."
침묵하던 혜준은 남자의 곧고 훤칠한 신장이 도로 바닥에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를 응시하다가 그만 눈물이 터져나왔다.
"...두려워서요."
"..."
혜준의 눈물방울은 굵었다. 이헌은 몇 걸음 앞에서 동그란 밤톨머리를 한 제 부하직원이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뭉개지는 발성으로 겨우겨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고 점퍼 주머니로 제 두손을 넣어버렸다.
"두려워서...제가 운 좋게 유진 한의 관심을 얻은 것을 빼면."
"..."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봐..."
"..."
"두려워서..."
혜준은 그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숙인 혜준의 머리 밑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쏟아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헌은 그저, 주머니 속의 제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우뚝 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존재하지 않는 제 누이를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
그래야만 했다.
세상의 어떤 오빠라도 제 동생이 운다고 무작정 달려가서 안아버리지는 않을테니까.
"그런데...무서웠습니다."
"...뭐가."
이헌은 제 속의 홧홧한 불길을 잠재우지 못하고 절절끓는 눈길로 혜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사실은 혜준이 이제 그만 멈춰줬으면 했다.
"..."
발진하는 자신을 겨우 저 '햇병아리' 사무관이 막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할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기에.
"유진 한."
"..."
"연락이 왔을 때..."
"..."
"제가 정말...허 부 총리 말대로 해야할-"
순간 이헌은 몇 걸음이 되는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나가 혜준을 쥐어짜듯 감싸안아 버렸다. 놀라서 굳어버린 혜준의 목깃에 막무가내로 제 높은 콧날을 박고 숨을 들이마신다. 밤공기가 가져온 풀냄새와 이헌의 옅은 땀냄새. 그리고 시원한 우디향의 향수가 섞인 짙은 남성의 향이 순식간에 혜준에게로 스며들었다.
"이 사무관이 다 할 수 있게."
"..."
"내가 받쳐줄게요."
"..."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
"충분히 자격 있어요."
이헌의 말에 그만 울음에 딸꾹질까지 겹쳐버린 혜준의 등 위로 남자의 넓다란 손이 올랐다. 혜준은 이헌의 말에 짧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헌은 계속 혜준을 안고 있었다.
"..."
마른 등을 굵직하게 쓸어주면서도 목 밑에 콧날을 박고 숨을 들이쉬는 남자의 행동에 서러워 뛰던 심장은,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
"..."
다만, 시간이 한참 흐른 이후에도 이헌은 요지부동이었다. 혜준의 심장이 '다른 감정'으로 인해 서서히 제 박동을 또 빨리하려 하고 있었다.
같은 동료이자 상하관계가 뚜렷한 상사와 부하직원이 부둥켜안고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있을 만한, 이질적인 상황이 존재하기는 할까?
혜준은, 이헌만이 처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 없이 알아봐 주었다는 도취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국장님."
"...응."
사람하나 없는 도로 한 가운데에는 나즈막한 풀벌레들만 울고 있었다. 혜준은 여전히 제 목에 고개를 박은 채 반말로 응하는 이헌때문에 심장 께가 먹먹하고 간지러워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남자의 감은 눈을 따라 길고 곧은 속눈썹만이 혜준의 목을 바르작대고 있었다. 혜준은 탁,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에 고개를 젓는다. 혜준의 고갯짓을 느끼며 이헌은 눈을 떴다.
"...싫어서?"
혜준의 의사를 확인하듯 얼굴을 들고 묻는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에 혜준은 고개를 옅게 저었다. 혜준의 고갯짓에 이헌은 푸후- 하고, 웃음인지 아니면 체념의 한숨인지 모르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혜준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혜준은 그 뜨거움에 제 어깨 밑의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저 제 굽은 손끝으로 이헌의 허리께 옷깃만을 꽉 부여잡았다. 이헌은 하릴없이 웃으며 혜준의 목에 제 얼굴을 느리게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참 나..."
"..."
"숙소 가서 일이 될지 모르겠네."
"...되겠죠."
긴장한 듯 굳어 나온 혜준의 쉰 목소리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든 이헌은 혜준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꽉 마주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나즈막히 중얼거린다.
이 사무관이야 그렇겠지만... 나는.
그리고는 마저 웃어버리며 혜준의 손을 잡고 조금 앞서 걷기 시작한다. 혜준은 노란 등 밑에서 활활 타오르는 얼굴을 애써 곧게 든 채로 그를 따라 걸었다.
"국장님."
"...네."
어느새 또 존대로 호칭을 바꾼 그의 기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혜준은 정갈하게 셋팅된 남자의 검은 머리칼 옆 붉게 달아올라 빼꼼,하고 존재감을 나타내는 귓등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조 과장님 지금쯤 출국 하셨겠네요."
"...알아요."
혜준의 차가운 손을 감싼 손은 쉼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거칠고 단단한 손이었다. '어깨도 구부정하고...손도 차네.'하고 중얼거리며, 갑자기 무엇이 불만인지 심술을 부리는 듯한 이헌의 행동에 혜준은 기어이 옅게 웃었다.
"...한 사무관님 오늘 아이 보러 집에 가시는 것도 아세요?"
"..."
이헌이 우뚝, 걸음을 멈춰버리는 바람에 혜준은 단단한 등에 그대로 제 얼굴을 가볍게 부딪혔다. 등에 손을 올려 떨어지기도 전 그대로 뒤돌아 혜준을 거의 노려보듯 응시하는 남자의 목울대가 벌갰다.
이글거리는 눈빛 그대로를 담은 목소리가 혜준을 향해 꽃혔다.
"...숙소에 지금 아무도 없어요?"
"..."
"없어?"
"...네."
혜준이 대답하자마자 이헌은 그대로 혜준을 업으려했다. '아, 이건 아니에요. 국장님!' 하는 혜준의 만류에 고개를 꺾으며 넓다란 손으로 제 반듯한 얼굴을 쓸던 이헌이 푸후, 하고 한숨을 내쉬다 다시 혜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헌은 몇 걸음을 한 달음에 달려와 혜준을 안던 속도로, 그저 왔던 길을 되돌아 계속 걷기만 했다.
"아니, 국장님! 좀 천천히..."
"업게 해주면."
그럼 천천히 갈게요-...훤칠한 신장을 가진 남자의 보폭에 맞추지 못해 혜준은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뎠다. 그럴 때마다 혜준의 옆구리를 껴안고 그대로 들어올려 제 옆에 세우는 이헌의 행동에 혜준은 그만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이헌은 혜준의 웃음을 따라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도 성큼성큼 걷는 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혜준은 숙소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거의 이헌에게 안기다싶이 해 걸어올 수 밖에 없었다.
"아. 이게 왜."
"..."
이헌의 굵직하고 곧은 손가락은 숙소의 현관문 앞 도어락을 거의 짓누르듯 하고 있었다. 가엾은 도어락은 그저 삐빅,하고 오류를 뜻하는 신호음으로 응답한다. 혜준은 이헌의 옆구리에 껴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다 구릿빛 손가락 위로 제 하얀 손가락을 올렸다.
"..."
"...후."
...이헌은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뚝 솟은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제 손과 혜준의 하얀 손이 이루는 '명백한 대비'에 눈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혜준은 그대로 이헌의 손가락을 치우고 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작은 도어락 키패드는 혜준의 손가락에 맞춰 제작된 듯 이제서야 문을 열어주었다.
"...국장님. 뭐 하시려구 이렇게 급하세요."
"어?"
아- ...순간 당황한 이헌이 눈을 꿈뻑이며 혜준을 내려다보았다. 이헌의 귓불은 이제 선홍빛에서 거의 작열하듯 타오르는 붉은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숙소에 둘만 있다고 해서 왜 자신이 혜준과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발진하듯 뛰어가 혜준을 안았고, 혜준이 가만히 안겨있었다고 할지 언정...
"..."
"..."
이제껏 달려온 기세가 무색하게 이헌은 수더분하게 눈을 꿈뻑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던 이헌이 마침내 우두커니 선 채 외마디 음성으로 답했다.
"아."
"..."
"그러네..."
"..."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혜준은 순간 웃음이 터져 눈을 꼭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혜준의 보조개가 폭 패여 달이 밝은 밤 속에서 뚜렷히 제 존재감을 빛냈다. 이헌은 차마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바라보다가 제 볼에, 혜준의 보조개가 패일 만한 그 자리에 손가락을 갖다대 긁적이며 황망히 웃었다.
"아까는...아무리 농담해도 한 번을 안 웃어주더니."
"네?"
"이상한 데서만 웃네요. 이 사무관."
이헌은 씨익 웃으며 제 볼에 마치 아이가 '이쁜짓'을 하듯 검지 손가락을 폭 파가며 중얼거렸다. '여기, 보조개 엄청 짙게 패인다.'...그리고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속삭이듯 말을 흘려버린다.
너무 예쁘네.
"..."
"..."
이헌의 홧홧한 숨결이 자신에게 옮겨붙은 듯 가만히 서있던 혜준은 먹먹해져 꽉 조여오는 목구멍 사이로 겨우 말을 뱉었다.
"원래 보조개는...쓰임새 하나 없는 주름인거 아세요?"
"..."
"그런데 국장님한테는..."
하하- 하고, 민망해져 말을 끝내지 못한 채 그냥 웃어버리는 혜준을 멍하니 응시하던 이헌의 눈이 한 순간 점멸하듯 불타올랐다. 다시끔 혜준을 노려보는 듯한 표정이 된 이헌은 순식간에 혜준의 두 팔을 잡아채 그대로 숙소 안으로 들였다.
[Behind the scene #3.]
"아, 국장님. 국.."
"괜찮아."
혀와 혀가 얽히고 섥혔다. 숨이 가쁜 혜준이 이헌을 만류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몸을 뒤로 내뺄 때마다 이헌은 혜준의 볼이며 목, 자신을 막는 손바닥을 휘어잡아 짙게 쪽,쪽 하고 입을 맞췄다.
"..국장님. 아니, 국장님!"
"..."
"아니, 좀, 아!"
제 곧은 손으로 혜준의 가느다란 허리를 옷 위로 간질간질 거리는 이헌의 행동 때문에, 혜준은 또 하하!...하고 보조개를 짙게 패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헌은 혜준이 웃을 때마다 자신도 활짝 웃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혜준의 허리를 꽉 안고 숙소 2층의 제 방으로 성큼성큼 오르면서도, 혜준의 보조개가 짙게 패일 때마다 제 혀끝을 길게 빼어 끊임없이 그것을 콕콕 찌르고 핥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 잠깐만..요!"
"..."
도로에서 이헌의 말에 긴 침묵으로 답했던 혜준에게 복수라도 하듯, 이헌은 혜준이 아무리 자신을 진정시키려 말을 걸어도 그저 거친 숨만 혜준의 귀며 입 속으로 불어넣었다. 혜준의 인생에서, 그저 혀만 살짝 물었다 빼가며 전희를 위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키스'의 정의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헌은 게걸스럽게 제 혀를 혜준의 혀와 섞고, 혀뿌리를 뽑듯 혜준의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쪽,쪽, 하며 빨아가며 혜준의 침을 삼켰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행위에 혜준은 그저 이헌의 옷깃만 꽉 부여잡고 아득한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할 뿐이었다.
"아!..."
"후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헌이 쓰는 방 위 침대에 제 몸이 내려앉아 있었다. 순간 흠칫하고 어깨를 떨며 일어나려는 혜준의 상체를 이헌은 제 몸으로 내리 눌러버린다. 그리고는 짙게 끓어오르는 숨소리와 함께 혜준의 귀에 제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 사무관이 맞네요."
"아! 국장님. 좀!"
"이 보조개가..."
...나한테는 되게 쓰임새가 많겠네.
말을 마친 이헌은 제 코 끝을 혜준의 보조개에 폭, 박아보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