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심리학
written by. 랑
"이제 대부분의 기억은 돌아온 것 같으신데 아직도 그분에 대한 기억은 없으신가요?"
"네… 여전히 백지상태네요… 그분과 제가 어떤 관계였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가득한데 제 기억만 없네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지금 기억 돌아오신 것처럼 차차 돌아올 거에요.
"그래야 할 텐데…"
"다음 진료는 한 달 뒤로 잡을게요. 그 전에 이상 있으시면 꼭 내원하셔야 해요."
"감사합니다."
병원 밖을 나오자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춥지도 않은 날씨이건만 다리가 시린 느낌이 들어 벤치에 앉아 가만히 숨을 고르자니 지난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 *
일 년 전,
"응, 지금 공항 가는 중인데 아침에 차려둔 밥은 다 먹었어요?"
"당연하죠. 누가 해준 밥인데. 나 한 달 동안 이 밥 먹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국 끓여두고 나왔어요. 그거랑 냉장고에 해둔 반찬이랑 같이 먹어요."
"역시 내 애인이야. 빗길인데 운전 조심하고 다녀와요. 사랑해요."
"나도요."
이헌은 미국에서 열리는 경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저명한 학자들과 경제 관료들이 참석하는 이번 포럼은 그에게 좋은 기회였다. 한국을 대표해서 가는 만큼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긴장을 증폭시켰다. 분명 그녀는 그의 진정제였으니까. 하늘에는 구멍이 뚫렸는지 비가 퍼부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 열기를 가시게 해줄 반가운 비였지만 비 오는 날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연인이 걱정되었다.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났다. 통화를 마치고 당부대로 조심해서 운전하는 그 순간 뒤에서 빗길에 미끄러진 차가 들이 받았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앞차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대로 핸들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사고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헌에게는 10년을 건너뛴 상황이었다. 오늘은 2010년 여름, 맹장 수술 때문에 입원한 다음 날이었다.
의사들은 일시적인 충격이라며 치료를 받으면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유약한 아들을 보는 아비의 눈빛은 차가웠으며 자신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젊은 학생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끼던 후배인 상민이 옆에 남아 며칠에 걸쳐 10년간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심지어 자신이 강의한 수업 영상도 보여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이헌은 폐인이 되어갔다.
때가 되면 누군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진료를 받으러 갔으며 때가 되면 약을, 밥을 먹었다. 하지만 모두 헛된 짓이라 느껴질 만큼 이헌은 의지가 없었다. 모든 의사가 고개를 내저을 때 정신과 의사만이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시간 날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 어느새 이헌은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만에 이헌이 입을 열었다.
"오늘 몇 월 며칠이에요…?"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스스로 밥을 먹었고 운동을 했다. 진료를 보며 의사와 대화를 나누었고 상민이 보여주는 자료에 의지해 기억을 되찾으려 했다. 어느새 외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퇴원을 앞둔 날 의사는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선택의 심리학'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분명 기억이 돌아오는데 좋은 촉매제가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
"몸조심하시고 다음번에 뵐 때는 아주 사소한 기억이라도 좋으니까 꼭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병원 밖을 나오자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왔다. 차도 망가졌고 주소도 잊어버려 상민이 알려준 집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내밀었다. 오피스텔의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수리기사를 불러야 했고 속옷이 어디에 있는지 라면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해 종일 집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을 모두 둘러본 이헌은 넓은 거실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자신 스스로가 이렇게나 멍청한 인간인 줄 처음 알았다. 너는 실패작이라는 아버지의 폭언이 귀에서 맴돌았다. 우울한 마음에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는데 쪽지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혼자서 술 많이 마시지 말기!'
쪽지에 적힌 글씨체는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본인에게 이런 쪽지를 쓴단 말인가. 한참을 들여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안방으로 달려가 서랍장 문을 열었다. 한 칸을 꽉 채운 여성 의류와 속옷. 10년 사이에 악취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의 기억에는 없는 연인의 것일 테지. 그렇다면 이 쪽지 또한 그녀가 쓰고 간 것이다. 다른 쪽지가 있을까 싶어 집안 곳곳을 다시 살피자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노란 포스트잇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씻고 나와서 바디 로션이랑 립밤 꼭 바르기.'
'노트북 볼 때는 차단 안경 쓰기!'
'라면 끓여 먹지 말고 밥해서 먹어요.'
'어두운 곳에서 책 읽지 말고 이거 키고 읽어요.'
모두 이헌을 걱정하는 연인의 마음이 담긴 쪽지였다. 분명 기억에 없는데, 모르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쪽지에 떨어졌고 글씨가 번졌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번진 쪽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이고 미안하다 말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쪽지처럼 눈물로 얼룩지진 않았을까. 사고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 * *
최소 1년은 요양을 하셔야 한다는 주치의의 말에 휴직계를 냈다. 그래도 기억을 살리고자 모교에 방문해 수업을 듣고 상민과 같이 밥을 먹고 은사님과 면담을 했으며 자신이 쓴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명절 아니면 방문하지 않았던 성북동 본가에 찾아가 아버지와 독대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핸드폰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10년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스마트폰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사용법도 몰랐을뿐더러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니 초기화를 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안에 그동안 연락했던 사람들, 문자 기록, 그리고 사진첩에 연인의 얼굴까지 모두 담겨있을 텐데 열어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굳게 닫힌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이 작은 기계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상민이 꼭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애꿎은 검은 화면만 톡톡 건드릴 뿐이었다. 결국 연락을 위해 새로운 핸드폰을 개통해 사용법을 처음부터 익혔다. 새로운 비밀번호는 그의 생일인 0705로 정했다. 또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풀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가지며.
"형. 요즘 어때?"
"뭐가 어떻긴 어때. 아무 일도 안 하고 집에만 있지."
"그거 말고 기억 말이야 기억. 돌아온 거 뭐 하나라도 없어?"
"상민아, 너 언제 부교수로 승진한다고?"
"형…"
"형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한상민은 대학원생이었는데 언제 교수가 다 됐냐…"
훌쩍 지나가 버린 10년이라는 시간 속에 이헌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 * *
"여전히 기억은 안 돌아오셨고… 두통이나 어지럼증 같은 증상은 없으신가요?"
"네. 별다른 증상은 없습니다."
"채이…헌.. 씨… 원래 사고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의 경우 대부분 한 달… 안에 기억이 돌아오곤 하는데 이런 경우는 저희도 처음이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 혹시 제가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사고를 핑계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저는 이걸 기억하려 하고 기억나면 왜 기억하려 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까. 정말로 이런 경우라면 저는 기억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요?"
"……그런 경우일지라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채이헌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잊힌 기억 속에 사는 사람은 망부석처럼 채이헌씨를 기다릴지도 모르죠."
"그런가요…"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면 기억이 더 돌아오지 않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시면 기억 꼭 돌아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저… 선생님은 꼭 진정제 같아요. 사람은 편안하게 만들어주신다고 해야 하나…?"
"진정제요…?"
"그럼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이헌이 나가자마자 수간호사가 들어왔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노래를 크게 틀자 의사가 울기 시작했다.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흘리는 눈물은 벌써 석 달째 흘리는 눈물이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상민이 제자들과 점심 약속을 잡아주어 학교 근처 한식집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시은이 네가 저장 안 하는 바람에 우리 일주일 밤샌 자료 싹 날아갔잖아."
"야 그게 언제 일인데 넌 그걸 아직도 걸고넘어지냐?"
"내가 그때 밤잠 못 잔 거 때문에 다크서클 내려온 게 아직도 안 지워져서 그런다."
"내가 꼼꼼히 확인 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그래도 한울 학생이 저장해둔 자료 덕분에 수월했습니다. 고마웠어요."
"크으 역시 우리 교수님. 야야 다들 나 아니었으면… 교수님!!"
"어…?"
자신도 모르게 그때 있었던 일이 기억나며 자연스레 말을 보탰다. 앞에 앉은 학생들의 이름이 기억났다. 시은 학생, 한울 학생, 지원 학생, 졸업한 결 학생까지. 순식간에 모르던 곳이 익숙해졌다. 학교 주변 단골집 이름도, 자신이 썼던 논문도, 집에 가는 지름길도. 곧바로 카페를 벗어나 병원 예약을 잡았다. 전화하는 그 순간에도 주변에 보이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 길 건너 포장마차에서 동료 교수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기억을 잃은 뒤로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에 색이 입혀지며 다시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 * *
"그럼 지금 기억은 어느 정도 돌아오신 거죠?"
"세세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기억은 다 돌아온 것 같아요. 학생들 이름이나 강의했던 내용이나 현관 비밀번호 같은 기억들이요."
"……학생들 말고 다른 사람들 기억은 없나요…?"
"다른 사람이라… 본가에 새로 오신 가정부님 그리고 재작년에 태어난 친한 동생 아들 정도…"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게 연인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아요."
달칵
의사의 손이 덜덜 떨리며 쥐고 있던 펜을 놓쳤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며 식은땀을 흘리자 이헌이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 주었다. 물을 마시는 건지 흘리는 건지 모르게 한 컵을 다 비우자 자신의 앞으로 내민 손수건에 의사는 황급히 진료를 마쳤다.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쉽게 진료실 앞을 벗어나지 못하다 교수님 오늘 진료 끝이라는 간호사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우는 얼굴이 익숙했던 걸까. 포럼에서 만났을까 대학에서 만났을까. 하지만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학도 다르고 포럼에서 본 적도 없으며 선 자리에서 만난 사람도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바람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그런 거라며 노트북을 덮었는데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선택의 심리학. 그때 의사가 건네준 책이었다. 일단 받긴 했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 들고 왔는데 어째서 두 달 만에 눈에 띈 걸까. 책을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아 표지를 열자 속지에 짧은 편지가 쓰여 있었다.
'2015.11.7 청계천 헌 책방 거리에서 이혜준. 010-####-####'
"이혜준…?"
이혜준… 이헌에게 이 책을 건네준 의사의 이름이다. 혹시라도 책을 잃어버렸을 때 전화하라고 번호를 적어둔 걸까. 본인의 스타일이겠지 하고 일단 넘겼다. 헌 책방 거리에서 구매한 건지 손때 묻은 종이에 구석구석 필기까지. 이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졌다. 한 권을 다 읽자 마지막 장에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남의 책이라 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손은 편지지를 펼쳤다.
'책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중간에 필기해두신 내용도 읽어보았는데 경제학적 관점에서 심리 법칙을 바라보는 게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교수님의 의견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혹시 다음 주 토요일 괜찮으실까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이혜준-'
본인의 책이 아니었나? 앞에는 본인 전화번호를 적어 뒀으면서 어째서 이런 편지가 있는 거지. 궁금증이 생겼지만 남의 사생활을 깊게 파고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안 본 척 편지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책을 덮었다. 다음 진료에 돌려줘야지 하는 다짐을 하고선.
* * *
기억이 돌아오자 잊고 살았던 잠긴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도 생각났다. 160123. 무슨 의미가 있는 숫자인지 모르겠는데 대략 기념일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열어보자 채이헌이란 사람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카카오톡, 전화번호부, 사용하던 앱, 그리고 갤러리에 사진까지. 갤러리를 열어보자 읽고 싶은 책을 캡처해둔 사진,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풍경 사진, 그리고 연인의 사진이 가득했다. 폴더를 열어본 이헌은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폴더 속에 가득한 사람은 정신과 상담을 해주는 의사였으니까.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도 있었고 혜준이 찍은 것인지 자신이 강의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더는 사진을 넘기지 못했다. 상담하던 의사의 얼굴이 생각났기에. 반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럼… 아까 그 편지 속의 교수는 자신이겠지.
살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한 건 처음이다. 뜬눈으로 밤을 샌 이헌은 아침이 되자마자 혜준을 찾아갔다. 어떻게 할 건지 아무런 계획도 없다. 일단 혜준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기에. 연구실 앞에서 3시간 같은 30분을 보내고 나서야 혜준을 만났다. 자신의 연락을 받고 급히 출근했는지 덜 마른 머리에 구겨 신은 운동화 그리고 채 매지 못한 넥타이를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앉으시라는 말 이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혜준은 이헌이 가장 좋아하는 율무차를 타서 건넸다. 이것 또한 연인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겠지.
"지난번에 주신 책 다 읽어서 돌려 드리려고 찾아뵀습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편지 읽어보셨어요? 맨 뒷장에 편지."
"……네."
"기억이 나시던가요? 아니면 여전히…"
"죄송합니다… 제가 핸드폰에 있는 선생님 사진까지 봤는데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편하게 말해도 될까요? 도저히 정중하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네…"
떨리는지 커피 한 모금을 삼키곤 혜준을 말을 이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 이제 드디어 울지 않아도 되는구나. 했는데 나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 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죠. 그때 생각났어요. 이헌씨가 혹시라도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닐까 했던 그 말이. 그래서 내가 잊고 싶은 기억은 아닐까 봐 나랑 사랑했던 그 모든 시간이 이헌씨에겐 끔찍했던 기억이었나. 내가 이헌씨 앞에서 사라져주어야 하나. 온갖 검은 생각들이 저를 집어삼켰어요."
혜준을 볼 자신이 없는 이헌은 고개를 더 숙일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것이란 말인가. 경솔했던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요 나는 채이헌을 놓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라도 채이헌을 보는 게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이헌씨 붙잡았어요. 내가 마음을 다하면 불쌍해서라도 나 다시 만나주지 않을까 해서. 나요. 사랑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헌씨가 나한테 사랑이란 거 알려줬어요. 포럼에서 돌아오면 프러포즈하려고 반지도 사뒀어요. 기억 돌아오면 주려고 늘 가슴 속에 품고 다녔고. 사람 많은 길거리라도 기억만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줄 수 있을 만큼 진심이었어요. 근데 그거 다 녹슬어서 버렸어요. 이헌씨 금방 깨어날 줄 알고 손에 끼워뒀는데 상처가 다시 터지는 바람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서 상했더라고요..."
"제가…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눈은 울고 있다. 이 말을 이헌에게 건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혜준은 여기서 울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후 혜준은 야외 치료라며 종종 이헌과 병원 밖에서 만났다. 정확히는 치료를 빙자한 데이트였지만 말이다. 이헌은 혜준이 데려가는 장소들이 예전에 함께 왔던 곳이란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눈치를 볼 순 없었다. 병원 앞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혜준의 얼굴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손을 놓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이 선생님. 이 아닌 혜준아. 로 불러주는 기적을 바란 것이다.
* * *
11월. 먼저 연락하는 적이 없던 이헌이 다음 치료는 자신이 아는 곳으로 가자며 연락을 했다. 혜준은 그날 하루를 통째로 쉬었다. 차에 탄 혜준의 눈에 안대를 둘러주곤 절대 벗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책방이었다. 의자에 앉아 안대를 푸르니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에 순간 눈을 찌푸렸고 이헌이 책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람 착각하게 여전히 다정했다. 선택의 심리학. 햇빛이 사라지자 책을 거두어 책장에 꽂곤 다시 꺼내 혜준에게 건넸다.
"책값으로 밥 한 끼 하실래요?"
채이헌이 돌아왔다.
굳게 말아쥔 두 손이 이헌을 약하게 때렸다. 마음 같아서는 피멍이 들도록 내리치고 싶은데 몇 달 전까지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사람이라 세게 때릴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완성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고 한 음절에 한 번씩 내리쳤다. 점점 손에 들어간 힘이 약해지더니 책을 뺏어 들곤 다시 내리쳤다. 오래된 책인지라 표지가 찢어지고 속지가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런 혜준에게서 책을 빼앗고 진정시켰다.
"혜준아, 진정하고 일단 내 말부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냥 기억이 돌아왔으면 돌아왔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여기까지 데리고 오냐고요!"
"나는 여기서 알려주면 더 좋아할 것 같아서…"
"기억도 안 돌아오고 여기 데려온 거면 두 번 다시는 얼굴 안 봤어요."
"미안해. 미안해 혜준아."
"진짜 이벤트 드럽게 못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못할 줄이야."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마지막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싶은 찰나 웃어요? 하는 혜준의 일갈에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 대 더 맞을 줄 알았는데 두 팔을 벌리며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표정을 짓고 있자 사르르 웃으며 안겼다.
"나 화 완전히 풀린 거 아녜요."
"알지.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 혜준아."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요. 나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는데."
"뭐? 빨리 가자. 거기 늦게 가면 못 먹는데..."
밥에 목숨 거는 거 보니 채이헌 맞네. 초조한 듯 손목시계를 초 단위로 보자 결국 거기 예약해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채이헌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런 건 미리 말해달라고 말하자 아직 화가 안 풀렸다며 새침하게 창밖을 쳐다보았다. 식당에 늦지 않게 도착했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커피 한 잔씩 사 들고 차에 타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몇 달 만일까. 혜준이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이헌의 입술을 타고 흐른 건 그들만의 비밀이다.
* * *
[에필로그: 이헌과 혜준의 첫 만남]
"어?"
"어?"
두 남녀가 동시에 같은 책을 집었다. 절판된 책이라 중고사이트나 헌책방 아니면 구할 수 없는데 하필 여기서 이 책을 찾는 사람을 만나다니. 일주일 넘게 헌책방을 돌아다닌 혜준이 낭패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이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책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어째서 이 책을 찾는 사람이 또 있는 거지. 책방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책을 올려두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과연 누가 이 책의 주인이 될 것인가. 묘한 긴장감이 감돌자 사장님마저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 책을 찾으려고 일주일을 돌아다녀서요."
"저는 다음 수업에 이 책을 써야 해서요."
"이 책 저한테 주시면 책값 열 배 드리죠."
"저는 돈 필요 없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팽팽히 맞서는 이헌과 혜준이다. 30분을 맞선 끝에 혜준이 책을 포기했다. 책을 얻어서 기분은 좋지만 뭔가 옆구리 찔러서 절 받은 느낌이 가득해 먼저 나간 혜준을 붙잡는 이헌.
"책 왜 포기했어요? 일주일이나 찾았다면서."
"왠지 제가 책 포기하고 나서면 그쪽이 저 붙잡으실 것 같아서요."
"네…?"
"책값으로 밥 한 끼 하실래요?"
책 대신 이 남자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혜준의 계산이 맞아떨어졌다. 혜준 본인도 연애를 많이 안 해봤지만, 이 남자는 더 안 해봤는지 행동 하나하나가 과하고 뚝딱이고 사고뭉치 세 살배기 어린이 같았다. 그래도 허허 웃는 저 너털웃음에 푹 빠져버린지라 오늘도 이헌의 손을 잡고 헌책방 골목을 돌아다니며 선택의 심리학을 찾는 혜준이다.
-完.